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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왕실장' 김기춘과 이후락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6)

‘왕실장’ 김기춘과 이후락


 박근혜 정부에서 최고실세는 ‘왕실장’이라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 왕실장은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요즘 그의 위세는 총리는 물론, 국회의장, 대법원장보다 높아 보인다. 그는 얼마전 자신의 이런 평가가 부담스러웠는지 “나는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승지(承指)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달라진 정국을 보면 그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용준 총리후보 인사에서 어긋나기 시작해 김동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김병관 국방부장관 내정자 등을 통해 망사(亡事)가 됐고, 윤창중 대변인 추행으로 정점을 찍었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검찰은 국정원과 경찰의 대선개입 의혹을 수사하고,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했다. 거리에는 ‘불법 선거 무효’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새정부는 출범도 하기전부터 비틀거렸고, 위태롭게 지탱했다. 

 그런데 ‘왕실장’이 부임하지마자 정국은 180도 바뀌었다. 대대적인 전쟁위기설이 전개되더니 ‘종북몰이’ 광풍이 몰아쳤다. 매카시즘 광풍에 보수 야당은 고개를 숙이고, 준(準)진보정당마저 스스로 ‘진보’자를 벗어 던졌다. 모두 ‘나는 이석기를 싫어해’라고 자아검증을 선언해야 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보언론도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더 매카시즘 광풍에 함몰됐다. 

 사정기관 최고 책임자를 ‘혼외자식’ 문제로 간단히 정리하고 드디어 모든 길을 청와대로 통하는 40년전 ‘질서’로 회귀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던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한 명의 교체로 정국을 180도 반전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대단한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왕실장의 대표적 인사를 꼽으라면 두말없이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꼽는다. 사진은 이 비서실장의 한 50년전 모습이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61년 장면 총리 직속 정보연구실장 시절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하사관 교육을 받은 이씨는 해방후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군인의 길에 들었다. 박정희씨가 만주육사를 나온 것과 일면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5·16 쿠테타 이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을 거쳐 민정이양 이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무려 6년간 지냈다. 당시 최고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자신이 육본 정보국에서 ‘쫄따구’로 데리고 있었으니 그 파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락씨의 청와대 비서실장 6년 재임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이라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입이 무거운’ 이후락 실장은 사실상 국정 전반을 요리했다. 나중에 북한에 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담인데 그 동생 이거락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스캔들인 정인숙 사건을 처음 수사한 마포경찰서장이었다. 한 23년전 기자는 정인숙 사건을 취재한다며 부산에 살고 있는 이거락씨의 집앞에서 인터폰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때 아파트 인터폰으로 ‘정인숙 사건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라고 질문하면 ‘할 말이 없어요’라며 뚝 끊고, 다시 인터폰을 누르고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왕실장인 이후락 이거락 형제는 박정희 시대 정치·남북관계는 물론, 스캔들에 관해서도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후락씨는 이 비밀을 고스란히 안고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도 부친처럼 ‘왕실장’을 통한 통치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 지금까지 박근혜식 정치 스타일에서 달라진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차이점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은 부친의 ‘거사를 같이 한 동지’라는 의미와 또 다르다. 단지 ‘옆에 있다’는 물리적인 거리일 뿐이다. 이는 지구 반대편 사람과 전화, 인터넷, SNS 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공간적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금보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천하의 왕실장도 자신의 이런 한계를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