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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이동화와 박준규의 같음과 다름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7)

이동화와 박준규의 같음과 다름


 최근 한 육군 장성이 ‘진보’를 ‘종북’ 혹은 ‘패륜’으로 매도하는 책을 써 물의를 빚고 있다. 이상현 5군단 부군단장이 출간한 <종북세력의 주장과 비판>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소장은 “그들이 신봉하는 혁신적 가치인 공산주의 사상을 강요하는 행위를 바로 ‘진보’라 할 수 있다”고 자기 ‘꼴리는 대로’ 진보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이 소장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진보세력’, 이것이 좌익세력이 주장하는 진보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매도하고 “진보는 전통적 가치를 배제하는 부모경시와 같고, 보수는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부모 공경”이라고 말도 안되는 정의를 내렸다.

 진보를 도덕적 패륜으로 비약시키는 논리전개가 전혀 객관적이기도, 또 합리적이지 않다. 이렇게 인과관계도, 논리의 연관성도 없는 사실을 억지로 꿰맞추는 비논리적 인물이 어떻게 별 둘까지 진급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 사람의 약력을 보아하니 일선 사단장도 했는데, 이런 사람에게 우리의 아들의 군복무와 대한민국 국방을 맡겼다는 것에 간담이 서늘하다.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현대사 사람을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사진은 이동화(사진 왼쪽) 선생과 박준규(사진 오른쪽) 전 의원이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중반 나란히 경북대 정치학과 교수로 같이 근무해 서로를 잘 아는 사이다. 아마 1961년 7.29 총선에서 같은 대구지역에서 출마했을 때 모습으로 보인다.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매우 표정이 진지하다.

 두 사람은 언론인, 교수, 정치인 등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은 진보의 길, 다른 한 사람은 보수의 길이다. 두 사람의 삶을 살펴보면 진보적 인물과 보수적 인물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했고, 어떤 패악을 끼쳤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우선 이동화 선생은 일제시대 항일 지하운동으로 3년간 투옥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광복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기를 지냈고, 해방 직후에는 조만식 선생이 운영하던 <평양민보> 주필을 지냈다. 한국 전쟁후 월남해 경북대 교수, 1954년 이후 성균관대, 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다. 이동화 선생은 이 과정에서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1957년에는 민주혁신당 정책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사회대중당 결성에 참여해 61년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이동화 선생은 1972년 대중당 대표 최고의원 권한대행을 지냈으나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완전히 정계를 떠나 저술활동과 민주화·통일운동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진보적 인물로 진보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에 비해 박준규 전 의원을 보자.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보수정객이다. 그는 젊은시절 미국에 유학한 후 귀국해 <부산일보>사장, 경북대 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호시탐탐 정계진출을 노렸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대구 달성군에 두 차례나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결국 4·19혁명이 나고 5대 국회에서 보수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대망의 금배지를 달었다. 사진에서 이동화는 낙선, 박준규는 당선된 것이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그는 잽싸게 공화당으로 당을 갈아타 서울과 대구에서 내리 당선, 6선을 기록했다. 박 전의원은 이후 12·12 쿠데타 세력의 민정당으로 들어가 1990년 대망의 국회의장이 됐다. 1992년 14대 국회의장에 연임됐으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처음 도입한 재산공개 파동에 휩싸였다. 재산공개 결과 그는 호화 빌라는 물론 전국적으로 무려 70채나 되는 서민아파트를 가지고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파렴치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김종필의 자민련으로 자리를 옮겨 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에서 다시 국회의장이 되는 천수, 만수를 누렸다. 그는 9선이라는 우리나라 최다선 기록(김영삼, 김종필과 공동)을 보수노선으로 일관하면서 양지바른 곳에서 살았다. 

 언론인 출신에 대학 교수를 거쳐 진보적 정치노선을 걸어온 이동화 선생은 평생 금배지를 달지 못하고, 허름한 안암동 서민아파트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후학들은 그를 높이 평가해 여러 전기·평전 등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역시 언론인, 같은 대학출신으로 보수 정치노선을 걸어온 박준규 전 의원은 9선에, 국회의장 3번이라는 전무후무한 정치적 영달을 누렸다. 그리고 70채의 서민아파트를 챙긴 거부로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정치적 영화를 누리고, 재산을 가졌지만 그를 기억하거나, 기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 현대사는 진보와 보수를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나는 내 자식에게 양지만 쫒으며 치부하지 말고, 양심을 지키며 소신껏 살라고 가르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