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출신 한 공기업 이사장이 있습니다. 이 분은 매달 월급날 부인과 자식을 모아놓고 월급 전달식이라는 것을 합니다. 가족을 모두 ‘집합’시킨 후 “아버지가 한 달 열심히 일해 번 소득이니 알뜰히 쓰라”는 일장 훈계 후 월급 봉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월급 전달식을 하는 이유로 가장의 노고를 이해하고 돈을 절약해 쓰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참 고지식한 공무원입니다. 사실 그는 한평생 고지식한 공무원으로 살았습니다. 서울 명문대도 나오고 행정고시에 합격했지만 지방에서 촌사람처럼 근무했습니다. 30대 시골 관선 군수시절 가뭄 대책에 매달리다 맹장이 터진 적도 있고 지역 시민단체로부터 이례적으로 청백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방에서 그의 별명은 ‘미스터 규정’으로 통했습니다.
그 청렴함으로 그는 참여정부 행정자치부 감사관으로 발탁됐습니다. 감사관 시절 그는 산하기관 감사 결과 보고서를 원문 그대로 공개했습니다. 예전에 없던 이 일은 아마 지금 정부 들어선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또 기획관리실장 시절에는 공무원의 재산 내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했습니다. 과거 공직자윤리법은 재산 총액을 첫 번째만 신고하고 다음부터는 변동사항만 신고하도록 돼 있어 정확한 현재 재산을 파악하기 매우 어렵게 돼 있었습니다. 이것을 일반인이 보기 쉽게 고친 것도 그 고지식한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그는 1급 공무원에서 용퇴해 조그만 산하기관 이사장으로 갔습니다. 이 자리도 보통 1급 공무원이 은퇴하면 가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사표를 내라는 겁니다. 임기가 있는데 잘못 없이 사표를 내라는 것을 그 고지식한 공무원은 이해할 수 없었지요. 이를 거부하니 감사가 나왔습니다. 그도 감사관을 한 터라 표적 감사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감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사소한 해외 출장건을 꼬투리 잡아 해임하겠다고 합니다. 이 고지식한 공무원 출신은 “억지로 이사회를 열어 해임하겠다니 이를 참고 견뎌야 할지 원칙을 고수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이 고지식한 공무원에게 조언했습니다. “원칙을 고수하시라, 사표를 내는 것은 불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사퇴를 강요한 날짜와 증거를 적는 사퇴 강요 일지를 쓰시라, 그 일지는 나중에 재판에서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얼마 전까지 그 고지식한 전직 공무원은 잘 버티고 있더군요. 하지만 그의 투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솔직히 기자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을 임명한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물갈이로 기용된 이들은 대부분 정치적 인물입니다. 노조에서도 한심한 인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이번 호 Weekly경향에서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실태와 물갈이로 들어온 사람들의 ‘훌륭한’ 면면을 보십시오. 인사(人事)가 아닌 망사(亡事) 바로 그것입니다.
<원희복 편집장 wonhb@kyunghyang.com>
2009/01/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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