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에 해당되는 글 71건

  1. 정치사건 판사의 말년고뇌-김갑수
  2. 25년 전 보도자료
  3. 2세 정치인의 명암
  4. 데자뷰 1987년...
  5. 변호인, 기자 & 큰 정치인
  6. 실망스런 이경재 방통위원장
  7. 돌아온 허인회
  8. 삐딱한 이재오
  9. 땅을 치며 한탄할 김근태
  10. 노무현에게 ‘골 지른’ 기자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4)

정치사건 판사의 말년고뇌-김갑수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법언이 있다. 판결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자신의 판결에 대해 실제적 혹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예술도, 문학도 혹독한 비평의 세계가 있는데, 가장 현실과 밀접한 사법적 판결에 비평이 없을 수는 없다.


사실 판사의 판결문은 사법부 내부나 학계의 판례평석을 통해 냉엄하고도, 혹독하게 평가받는다. 하물며 정치, 사회, 역사적인 사건의 판결은 말 그대로 정치, 사회, 역사적 영역에서 혹독하게 판례평석을 받아야 한다. 이 역사적 판례평석에는 소멸시효도 없다. 대표적 사례가 1959년 진보당 사건의 김갑수 판사이다.

 



사진은 진보당 사건 상고심에서 조봉암 당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김갑수 판사의 1990년 모습이다. 나이 79,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말년의 모습이다. 알려진 대로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을 사법적으로 제거하고,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정당을 해산시킨 매우 정치적이고도 역사적 사건이다.


1989년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가 추진됐다. 이 때 기자는 그를 명동의 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김갑수 변호사도 말년이고, 재심청구가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진보당 판결에 대해 진실을 말할까 싶어서였다.


그는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사진에서는 웃고 있지만 당시는 매우 피곤하고 힘든 모습이었다. 그는 진보당 판결에 대해 설혹 정치적 의도로 기소됐을지 모르지만 재판과정에서 정치적 개입은 없었다고 강변했다. 기소한 검찰(이승만 정권)에게 책임을 돌리는 답변이었다. 아마 이것이 김갑수 변호사의 마지막 인터뷰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김갑수 판사는 진보당 판결로 대법관, 대법원장 직무대행까지 되는 호사를 누렸지만 이승만 정권 몰락 후 만인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는 진보당과 조봉암 법살이후 자신의 판결에 대해 혹독한 오판 논란과, 해명을 요구받았다. 판결 후 30년이 지나서도 계속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진보당 판결은 오판이었나’ ‘진보당 사건과 나등의 글로 해명해야 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도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응답해야 했다. 김 변호사는 말년에 기자와 만났을 때 체념한 표정으로 진보당 사건 판결 논란은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며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한 회한을 이야기했다.


그는 최초의 진보정당 당수에게 사형을 선고해 죽게 만들고, 진보정당을 해산시킨 법률적 장본인이었지만, 1981년 스스로 신정사회당(김철 사회당과 통합)이라는 나름 진보정당을 만들어 총재가 되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았다. 이런 행보는 자신의 오판에 대한 무언의 속죄이지 않았을까?


결국 이 진보당 사건은 53년 후 후배 법관들에 의해 오판으로 결론이 났다. 요즘 과거사 여러 사건들이 재심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사법부가 그 엄격한 조건의 재심을 수용하고, 사형을 무죄로 번복하는 것은 사법부의 통렬한 자기 고백이다.


최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수원지방법원 김정운 판사가 검찰의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모두 중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대해 오판이냐 아니냐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 판결 역시 과거 진보당 사건처럼 현역의원 구속, 정당해산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정치적이고, 역사적 사건이다.


이는 이 사건이 역사적 판례평석을 요구하는 사건으로 계속 논란이 될 것이며, 김정운 판사도 김갑수 판사처럼 자신의 판결에 대해 두고두고 해명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당해산을 논하는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마찬가지이다.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김갑수 변호사가 내가 죽을 때까지 진보당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지만 죽어서도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역사의 편례평석이다. 진정 법관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역사의 평결이다.

 

**추가; 역사적 정치 사건을 판결한 또 한사람의 대법관 출신이 바로 이회창 변호사이다. 그는 1961년 쿠데타 세력이 처음으로 조작한 민족일보 사건 심판관으로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건은 다음에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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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보도자료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3)

25년 전 보도자료

 

기자에게 보도자료는 하루를 일용할 양식이다. 하지만 보도를 필요로 하는 측에서 제공하는 자료는 대부분실적을 부풀리고, 문제점을 숨기는 속성이 있다. 게으른 기자에게 보도자료는 급식과 같지만 부지런한 기자에게는 허탈한 일이다. 그래서 유능한 기자는 보도자료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보도자료에는 반드시 몇월 몇일 몇시부터 보도될 수 있도록 협조바랍니다라는 엠바고 해제시점이 표시돼 있다. 실시간 보도되는 인터넷 매체가 많은 탓도 있지만, 대부분 제공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타이밍, 즉 홍보는 시점이 지나면 가치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제공>


위 사진은 1989124, 민가협(민주화가족실천협의회-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 가족의 모임) 회원들이 당시 야당 평민당사에서 농성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조작된 간첩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식과 남편에 대해 야당이 국회차원에서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추운 겨울, 난방이 꺼진 사무실에서 농성하는 어머니, 누님들의 모습이 눈물겹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당시 민가협 회원들이 농성에 들어가면 당시 기자들에게 배부한 보도자료이다.(당시 기자가 받아 보관하던 자료집 안에 보도자료가 있더군요) 자료는 ‘5공 청산은 간첩조작도 청산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타자기도 아닌, 손으로 써 복사한 것이다.



 

엉성한 이 보도자료는 당시 복역 중인 장기 구금(7년 이상) 양심수 216명의 사건별 유형과 연도별 통계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진짜 간첩은 50~60년대 남파 공작원이고. 70년대 이후에 남파 공작원은 사라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난 간첩들, 이를테면 납북어부 사건이나 재일동포 간첩사건 등은 대부분 조작된 가짜 간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만들어 같이 배포된 자료가 바로 민가협 산하 장기수가족협의회가 만든 간첩은 이렇게 만들어 집니다라는 자료집이다.



 

이 자료집에는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수감된 사람들이 어떻게 연행돼 고문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은 내역이 빼곡히 적혀있다. 공소장과 판결문의 허구와 가족들의 호소문과 탄원서, 편지글, 재판에서 진술 및 상고이유서 등이 실려 있다.


이 보도자료의 결론은 ‘70년대 이후 간첩은 대부분 혹독한 고문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임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확신은 이후 진실화해위원회나, 재심 등을 통해 옳았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낸 세금인 국가예비비(법무부 혹은 국방부)로 그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있다.


이 자료는 또 왜 간첩이 조작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반공을 위해 자유도 민주도, 인권도 희생돼야 한다는 경직된 반공 지상주의, 북으로부터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궁지에 벗어나기 위해 많은 간첩사건을 필요로 하는 정권의 부도덕성, 수사관들의 포상욕과 진급욕, 이런 것들이 간첩조작이 자행되는 이유하라고 분석했다. 사실 이 대목은 영화 <변호인>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그리고 아래 책은 국정원이 자신이 간첩을 조작한 사실을 인정하고 그 참회록을 무려 6권의 전집으로 남긴 기록이다. 조작한 기관 스스로 이렇게 방대한 참회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간첩조작은 누구도 부인못할 진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25년 전 이 엉성한 보도자료와 자료집은 매우 정확하고 신뢰성 높은 보도자료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유력언론은 이 보도자료를 기사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는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된 세련되게 포장된 경찰과 검찰, 안기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썼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결정적 증거가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증거로 제출된 사진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나자 이번에는 중국의 출입국 증명서를 조작해 충격을 주고 있다. 조작 사실이 폭로되자 검찰은 국가정보원에 책임을 돌리고, 국정원은 외교부 탓을 하는 등 총체적 국가기관이 조작에 개입된 사건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 사건은 25년 전 민가협 보도자료 처럼 간첩이 만들어지는 것임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사안임을 보여준다. 솔직히 지금 벌어진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은 남매간 혈육의 정을 유린하고, 타국의 공문서까지 위조해 외교문제까지 야기한 사건이다. 이 사안은 25년 전 자료집에도 나오지 않는 훨씬 악의적이며, 훨씬 국제적으로 진화된 조작사건이다.


엠바고 표시 없는 25년 전 엉성한 보도자료가 지금에도 유효한 자료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기자들은 누가 제공한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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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정치인의 명암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2)

2세 정치인의 명암


요즘 정치권에는 2세 정치인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심지어 3세 정치인까지 등장했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1야당 민주당 김한길 대표최고위원은 1976년 박정희 대통령과 맞선 김철 전 사회당 당수의 아들이다.


현재 여야 사무총장도 모두 2세 정치인 출신이다. 요즘 아프리카박물관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착취사건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홍문종 사무총장은 부친(홍우준*12대 민정당)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경우이다. 민주당 노웅래 사무총장의 부친은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으로 역시 지역구를 물려받았다서울 중구 정호준 의원의 부친은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이고, 조부는 정일형 전 외교부장관으로 3대 정치인이다. 자식들도 대부분 부친의 정치적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치적 신념도 부전자전인 모양이다.

 

사진은 1960년 제5대 국회에 나란히 등원한 김영삼 의원(사진 오른쪽)과 이철승 의원(왼쪽)의 모습이다. 국회 본회의장 명패 앞에서 마주보며 얘기하는 모습은 50여년이 지난 지금 얼굴 그대로이다. 이철승 전 의원은 올해 93세이지만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고,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최근 건강이 좋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현실정치에 왕성하게 멘트를 했다.


두 사람은 3대 국회(1953)에 나란히 금배지를 다는 등 정치적 시작은 비슷했지만 정치적 노선은 많이 달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당이었지만 적대적관계였다. 이철승 의원도 5.16 쿠테타로 고통을 받았고, 박정희 독재에 항거한 투사형이다. 그러나 1976년 제1야당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자 중도통합론이란 애매한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 때 이철승 의원을 밀약’ ‘사꾸라라고 몰아 부치며 선명 야당을 주창한 사람이 바로 YS였다이철승 의원은 결국 이 사쿠라 논쟁에 헤어나지 못하고 7선을 끝으로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YS는 이 사꾸라 논쟁으로 당권을 쥐고, 40대 기수론으로 정치적 거목으로 성장했다. 이때 40대 기수론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선 사람이 바로 두 사람과 김대중 의원 세 사람이다. 그중 YSDJ는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두 사람의 2세가 지난 대선에서 다시 관심을 끌었다. 이철승 전 의원의 딸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가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생의 공신으로 활동한 것이다. 부친이 말년에 보인 정치적 행보와 일면 비슷한 길을 걸은 것이다


YS는 끝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화해하지 않았다.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대선 직전 박근혜 후보를 칠푼이라고 혹평해 관심을 모았다YS의 차남 김현철씨 역시 부친과 같은 정치적 노선을 걷고 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다 좌절된 그는 지난 대선에서 반 박근혜노선을 걷더니 최근에는 아예 박근혜 저격수를 자임하고 나선 분위기이다.


그는 최근 트위터 등을 통해 부산 경남은 역사적으로 이 나라 민주주의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음을 기억하자라며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심판을 주장했다. 그는 또 현 정권은 과거 유신정권을 방불케 하는 독재를 답습하고 있다면서 아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지금 당장은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착각은 자유지요. ~ 당신이 권력자가 된 순간부턴 당신은 심판대에 올라선 거요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보통 아버지들은 자식들 생각까지 강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정치적 신념은 유전되는 것 같다. 자식이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졌다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서 기분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권자들이 이들 2세 정치인들에 호감을 갖고 표를 줬지만, 당선 후 행보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로 과거회귀' 이미지와 오히려 부친보다 ‘불통으로 고착되는 분위기이고, 김한길 대표 역시 부친만큼 용기도 없고, 제1야당을 야당답지 못하게 운영한다는 평가가 많다.


임금착취로 국제적 망신을 산 홍문종 의원도 그렇고, 국회본회의장에서 이상한 문자를 보다 들킨 정호준 의원도 그렇다. 요즘 2세 정치인들을 보면 정치적 신념은 부전자전(父傳子傳) 되지만 정치적 청출어람’(靑出於藍)은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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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1987년...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1)

데자뷰 1987...

 

법무부장관=“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은 법무부장관이 헌법위원회에 해산을 제소할 수 있다, 해산사유가 발생한 정당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제소를 검토하겠다.”


최근 헌재에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을 요청한 황교안 법무부장관 발언이 아니다. 1987511일 당시 김성기 법무부장관이 국회법사위에서 한 발언이다. 정적을 말살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치졸한 수법인 정당해산 기도가 27년 전에 벌어졌다.


1987114일 전두환 정권은 서울대 박종철 군을 고문하다 죽였다. 처음에는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나고 민심은 분노했다. 국민은 지리한 야당에게 분명한 행동을 요구했다. 51YS(김영삼) DJ(김대중)가 합세해 선명야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시 DJ는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 YS가 총재를 맡았다.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 노태우는 위기에 몰렸다. 이때 선명 야당 통일민주당에 대한 정당해산 기도가 시작됐다. 전두환 정권은 통일민주당의 정강정책이 국기와 민족생존권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내용이라며 대대적인 공안몰이를 벌였다. 통일민주당 정강정책 민족의 통일이 정치적 이념과 체제를 초월하는 민족사적 제1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국정지표로 삼는다”(2절 제8)는 대목을 문제 삼은 것이다.


대검공안부장이 통일민주당 창당에서 좌경용공세력 개입여부를 수사하고 있다고 위협했고, 법무부는 통일민주당의 정강정책을 수정하지 않을 경우 정당해산을 헌법위원회에 제소할 것이라 겁박했다. ’땡전뉴스와 어용 언론은 이들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첨예한 긴장관계는 5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광주민주화운동 추모미사에서 절정에 올랐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청와대, 안전기획부, 법무부, 검찰, 경찰 등이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불법 고문 치사도 문제였지만, 권력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국민은 분노했고, 정국은 거의 막장까지 이르렀다. 독재정권의 칼은 YS의 총재 취임연설, 정강정책 등 야당에 대한 종북몰이로 나타났다.




 

사진은 당시 문제의 정강정책 기초에 참여했던 두 당직자의 모습이다. 왼쪽은 이협 신민주전선(당시 야당 당보) 주간, 오른쪽은 안경률 선전부 부국장이다이협은 6.3세대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제적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졸업 후 신문사 기자를 하다 정치권에 몸담은 상태였다. 안경률 역시 서울대 철학과 재학 중 지하서클에서 활동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다전북 출신인 이협은 DJ의 동교동을 대리하고, 부산 출신인 안경률은 YS의 상도동을 대리했다.


사진은 61일 경찰에 강제 연행됐던 두 사람이 당사로 돌아와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경찰수사에서 묵비권을 행사, 일체 답변을 하지 않았다통일민주당은 이런 공안몰이에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적 대단결을 통해 통일을 해야 한다는 전두환의 1982년 연설을 들이대며 전 의원 단식농성으로 맞섰다.


결국 독재정권의 이런 공안몰이는 이른바 노태우의 ‘6.29 항복으로 유야무야 됐다. 스스로 국면전환용 공안몰이였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당시 눈을 부라리던 공안몰이의 선봉대 김성기 법무부장관이나 공안부장은 법률가로서 최소한의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곧 이어진 12월 대선을 앞두고 DJ는 평화민주당을 창당, 독자출마의 길을 걸었고 분열된 민주세력은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1988년 총선에서 3당으로 밀려난 YS는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과 합치는 이른바 ‘3당 합당을 단행한다. 그러니까 문제의 '종북' 정강을 가진 통일민주당은 지금 공안정국을 주도하는 새누리당의 할아버지뻘 정당이다.


사진 속 두 사람은 그 후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고 이협은 4, 안경률은 3선의 집권당 사무총장까지 지냈다. 이협은 DJ를 따라, 안경률은 YS를 따라 여야로 갈리기는 했지만 서로의 동지애는 남다르다.


햇병아리 기자 시절, 놀란 가슴으로 보았던 취재현장이 27년이 지나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지금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으로, 사진 속 통일민주당 이협, 안경률 연행은 이석기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당직자 구속으로, 그 때 박형규 목사 구속은 지금 박창신 신부 수사로, 통일민주당 정당해산은 지금 통합진보당 정당해산과 정확히 겹쳐진다. 소환자의 묵비권 행사나, 의원들의 단식투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87년 봄, 부도덕한 공권력이 공안몰이를 통해 마지막 반전을 시도하지만 결국 막장정치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몰락하느냐를 지켜봤다정당해산을 시도하려다 무위에 그친 그 때에 비추어 지금 정권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당해산을 실제 신청했다. 검찰도 징역 20년을 구형하면서 북한과의 연계는 없다고 밝혔는데, 헌재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거리다.


그런데 그해 12YSDJ의 분열로 엉뚱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등장했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독자노선, 안철수 신당 출현으로 인한 야권 분열까지 그 때를 닮아 가는가?

데자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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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0)

변호인, 기자 & 큰 정치인

 

정치인이 충원되는 루트는 여러 가지다. 논두렁 밭두렁을 타고 넘어 형님, 아우하며 바닥을 다지는 지방의원부터 시작하거나, 갑자가 청와대 낙점을 받아 공천을 받는 유형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나마 정치권에 많이 충원되는 직업이 법조인과 언론인 출신이다. 변호인 출신과 기자출신은 나름 정치판에서 효용성이 크기 때문이다. 법조인은 당 운영 과정에서 숱하게 닥치는 법률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자 출신은 정치에서 중요한 언론 창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어떤 법조인이나, 기자들은 일찌감치 정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다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19886월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YS)가 참모들과 진지하게 대책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당시 소장 판사 200여명이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는 이른바 제2차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사진은 당 차원에서 이 사법파동에 대한 정치적 대응책을 논의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쪽 YS 옆에 판사출신의 강신옥 의원, 오른쪽에 김광일 의원, 그리고 노무현 의원이 논의하고 있다. 저쪽 소파에는 기자출신 강인섭 의원과 서청원 의원이 앉아있다. YS두뇌는 빌릴 수 있으나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지론으로 많은 인재를 정치판에 영입했다.


강신옥 의원은 대표적인 1세대 인권변호사이다. 요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그린 영화 변호인이 사상 최대의 관객을 끌고 있지만, 사실 인권변호사로서는 강신옥 변호사가 훨씬 뛰어나다. 그는 1975년 민청학련사건 무료변론을 하다가 법정에서 구속됐다. 변호인이 법정 구속되는 사태는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김광일 의원은 영화 변호인에 등장하는 노무현 변호사의 선배 인권변호사이다. 노 변호사를 정치로 끌어들인 당사자이기도 하다. 대선배 앞에 노무현 의원이 다소 곧이 앉아 있다. 2차 사법파동으로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했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은 국회에서 후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는 정치적 강수를 뒀다.


권위주의 시절 정치판에서 한 가지 속설이 있었다. 법조인과, 기자, 교수 이 3대 직업 출신은 절대 큰 정치인이 못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갑()의 입장에서 편안하게 산 이들은 신념이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속설을 깬 사람이 바로 고졸 변호인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이다. 아마 노무현 의원이 명문대를 졸업했다면 중도에 편안한 길로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명문대를 나온 선배 인권변호사 강신옥 의원은 나중에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 21로 노선을 바꿨다. 역시 명문대 출신 김광일 의원도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냈으나 공천에 탈락하자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걸었다.


기자출신으로 가장 큰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물을 꼽으라면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조세형 의원 정도일 것이다. 그는 4선 의원으로 1996년부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지냈다. 그는 총재 권한대행시절 기자출신 정치인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농담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총재권한 대행은 자신의 정치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DJ의 지명에 의한 것이었다


사진 속 서청원 의원이 이번 새누리당 당대표에 도전한다는 소식이다. 원내 최다선인 7선에, 박근혜 대통령의 신임까지 받고 있어 그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서 의원이 당권을 거며 쥐면 기자출신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되는 첫 번째 인물이 되는 셈이다. 물론 그는 친박이지만 스스로의 정치력도 보통은 아니다.


사실 사진 속 인물 모두 박정희 정권 시절 초산 테러, 법정 구속 등 지독히 고난을 받았고, 지금도 '반박'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서청원 의원만 박정희 시대를 찬미하고 '찬박'임을 자임하고 있다. 솔직이 그런 변신이 지금 여당의 유력한 당 대표후보가 된 배경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역시 지명 혹은 '월급 대표'일 뿐이다.


 큰 정치인은 형식적인 지위가 말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큰 정치인은 초심을 지키며 열정을 갖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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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9)

실망스런 이경재 방통위원장

 

직장을 빼앗는 해직라는 단어는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정권 등 권위주의적 정권이거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는 정권에서 양산됐다. 특히 해직교수, 해직기자가 대표적이고, 심지어 변호사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해직변호사까지 만들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해직 변호사 출신이다. 게다가 문인이나 정치인을 구속해 글을 못쓰게 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해직정치인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얼마 전 경기도의 한 대학에서는 해직교수가 양산됐다. 사립대학이지만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기자나 문인, 반정부적 글을 쓰고 강의하는 교수, 정권을 비판하다 구속된 이른바 양심수를 무료 변론하는 변호사 등 비판적 지식인은 어느 정권이나 눈엣가시일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에서 쫒아 버리고, 자격을 정지시키는 짤린 지식인을 양산한 정권치고 오래 지탱하거나 역사적으로 좋게 평가받는 경우는 없다.





사진은 1987년 한겨레사회연구소 창립식 모습이다. 맨 오른쪽 이경재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있고, 맨 왼쪽에는 임헌영 경향신문 해직기자(민족문제연구소장)가 아예 눈을 감고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단상 앞쪽 장면에는 장을병 해직교수가 창립선언문을 읽고, 한완상 해직교수, 박형규 목사 등이 앉아있다.


1987년 학생 시민들이 일궈낸 6월 항쟁으로 전국은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떴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시대에 부응하려고 머리를 맞댔다. 그때 해직 교수, 해직 기자, 눈 밖에 난 종교인과 문인 등 이른바 짤린 지식인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한겨레사회연구소이다.


여기에는 해직 교수인 장을병(성균관대) 한완상(서울대), 김승균(서울대), 짤린 경제학자 박현채, 박용길 여사(문익환 목사 부인), 박형규 재야 목사, 재야 시인 고은, 그리고 해직 기자출신 김중배, 이경재, 임헌영, 김삼웅 등이 참여했다. 이 연구소는 자주, 민주, 통일이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나름 민주화, 통일운동에 이론적, 정신적 바탕을 제공했다.


1980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됐다가 1984년 겨우 복직된 이경재 기자(당시 논설위원)도 이 모임에 참여했다. 당시 그는 <유신쿠데타>(1986) <코리아게이트>(1988) 등을 저술하며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까발리는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양 김씨의 분열로 1987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이어진 1988년 총선은 양 김씨의 평민당, 민주당 영구 고착화를 확인하는 자리만 됐다. 민주화의 길은 멀어 보였고, 연구소 내 친 DJ와 친 YS 인맥도 각자의 길을 떠났다이때 이경재 기자는 YS를 따라 갔고,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공보수석, 대변인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지역구 국회의원 4선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알고 있던 정치인 이경재는 지난해 박근혜 정권에서 방송통신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장관급인 방통위원장은 공영방송사를 손에 쥐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부총리급이다. ‘짤린 지식인한겨레사회연구소 출신으로 박근혜 정권에서 이렇게 중용된 것은 이 위원장이 처음일 것이다.아니 당시 자주, 민주, 통일을 주창하던 '짤린 지식인'이 박근혜 정부에 동조한 사람은 그가 처음일 것이다


사실 그는 부총리급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날카로운 판단력과 용기를 가졌다. 그는 저서 <유신 쿠데타>에서 그는(박정희) 유신체제를 선택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 불행의 씨를 남겼고, 국가 민족에게는 민주주의의 퇴보와 헌정중단의 악순환을 유산으로 남겼다라고 평가했다.(p.69)


하지만 박근혜 정권에 가담한 이 위원장은 종교방송으로 허가받은 CBS가 보도방송을 하는 것은 유사보도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 해직기자들이 만들고 있는 뉴스타파도 유사방송이라는 이유로 제재하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언론관련 시민단체와 야당이 반대하는 KBS시청료 인상은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이런 방송정책이 CBS와 뉴스타파가 박근혜 정부에게 비판적이고, KBS는 우호적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은 간첩이라는 망말을 거침없이 하는 종편에는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 것에 비추어 참으로 실망스런 행보이다.


그는 방통위원장 인사청문회에서 해직기자 출신으로 방송언론의 자유와 비정파적 방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지금 방송이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비정파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본인이 말했듯이 해직기자의 처지는 자신이 고통스럽게 겪어봤던 경험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는 방송 민주화를 주창하다 해직된 후배 해직기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법원에서도 그들의 해직은 부당하다고 판결까지 했다


28년 전 피곤한 표정으로 짤린 지식인모임에 앉아있는 이경재 기자. 지금은 방송통신위원장이라는 자리에서 그 초심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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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허인회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8)

28년 만에 돌아온 허인회

 

그동안 열심히 녹색 건강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허인회 전 고려대총학생회장이 얼마전 연단에 올랐다. 지난 111일 독립문이 있는 서대문 공원에서 열린 민주화세대 시국선언 모임에서 였다. 허 씨는 80년대 중반, 이른바 전국 대학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의 산하기구인 삼민투 위원장을 지내며 학생운동의 전위적인물로 통했다.


이날 행사는 80~90년대 전국대학 민주동문회원이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성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13451명이 서명한 이날 시국선언은, 국정원 등 국가기관 대선 개입에 대해 독립적인 특검 도입, 정부정보기관 해체 수준의 개혁, 철도 민영화와 의료 시장 개방 등의 강압적 정책 중지, 경제 민주화와 노인 의료, 영유아 민생복지 즉각 시행 등을 요구했다.


허 씨 개인은 물론, 그의 집안은 모두 운동권이다. 그의 장인어른은 60년대 박정희 사법살인의 대표적 사건인 인혁당 사건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 인혁당 사건은 재심을 통해 부당한 국가권력의 만행으로 드러났고, 그의 장인어른은 겨우 쥐꼬리 만한 배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아무 문제없이 지급하던 과거사에 대한 배상금을 이명박 정부들어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 배상금 액수를 대폭 깎아 버렸다. 사실 대법원이 전원합의부가 아닌 재판에서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은 위법한 것이다. 이후 정부는 이들 피해자에게 보상금 일부를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무려 20%에 이르는 연체 이자까지 물린다고 한다. 과거 피해를 줬던 정부가 배상과정에서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다.


대를 이은 민주화운동으로 감방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허 씨는 운이 나쁜 것 같다. 허 씨는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후 감옥에서 나와 이런 저런 운동과 사업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정치판에 들어가 지구당 위원장까지 됐으나 2000년 청와대에서 DJ(김대중 대통령)에게 큰절을 한 것이 문제가 돼 선거에서 낙선했다. 큰 절 한 것이 봉건적 마인드라는 것이 이유였다


사실 홍준표 현 경남지사는 의원시절 YS(김영삼 전대통령)에게, 심지어 허 씨와 비슷한 연배인 새누리당 원희룡 전 의원은 전두환에게 큰절 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것에 비하면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과한 것이었다.

 




사진은 19854월 전학련의 3대 이념인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는 삼민투 허인회 위원장의 모습이다. 도서관을 점거해 격렬히 구호를 외치는 이 모습은 물론, 그는  태극기를 몸에 감고 삼민투 깃발을 흔들던 행동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삼민투는 전학련의 3대 이념을 실천하는 상설 전위조직이었다그는 이 활동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은 이들이 요구하는 민중민주주의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교묘히 위장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통합진보당 해산과 이석기 의원 사건에서 나오는 바로 그 민중민주주의 논란 그것이다이에 허씨는 198635일 서울형사지법에서 열린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중사관이 정립된 것은 1920년대 초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분은 공산주의에 적극 반대한 사람인데, 조선혁명선언이라는 것을 통해 민중사관을 정립했고, 그것이 바로 민족정통세력의 논리였습니다. ~ 이 땅에는 민족적 진실이 왜곡된 것이 많습니다. ~ 진정한 안보는 이 땅에 민주주의가 보장되고 군인들이 자기 직무에 충실하고 전선으로 돌아갈 때만이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계급적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존주의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존적 자각과 결론을 통해 우리는 환희를 느끼기 때문에 학생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 통합진보당 강령을 놓고 벌어진 민중민주주의논란은 28년 전 공안검사가 주장했던 그 논리와 한 치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허씨는 당시 법정에서 이 사건은 경찰권력에 의해 조작됐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공안검찰은 허인회 학생에게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구형했다28년 전은 바로 전두환 독재시절로, 요즘 1000만 관객을 향해 가고 있는 있는 영화 변호인의 시대적 배경이다. 그 당시 학생과 민주인사를 단죄했던 논리가 28년이 지난 지금 한 치도 틀림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녹색건강 사업을 하던 50대 가장에게 다시 마이크를 들고 연단에 서게 만든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이 시대가 생업에 매진하던 그를 전위의 행동가로 다시 불러낸 것은 분명 비극이다. 20대 학생 허인회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외쳤다.


민족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입니다. ~ 소크라테스는 최후 진술에서 그대들은 살터, 나는 죽을 터, 어느 길이 좋을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신만이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옳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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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이재오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7)

삐딱한 이재오

 

요즘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관심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이재오 의원이다. 18일 이재오 의원은 최다선 의원이며 친박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청원 의원과 정면 충돌했다. 이 의원은 이날 최고중진 연석회의에서 대통령이 개헌 논의가 정국의 블랙홀이 된다고 말했는데, 제어능력에 따라, 개헌논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블랙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심지어 이 의원은 국민 여론조사에서 75%가 개헌을 해야 된다고 응답했다면서 국민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소통이고, 국민 의견과 반대로 가는 것이 불통이라고 박 대통령의 아픈 구석을 찌르기도 했다.


그러자 친박 서청원 의원이 이명박 정부 때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었는데 정권의 2인자라던 이재오 의원이 개헌을 추진하지 못했다고 면전에서 힐난했다. 서 의원은 또 지금 우리는 개헌문제보다 국민 먹고사는 경제 살리는 데 우선 과제를 둬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박 대통령을 옹호했다.


사실 MB 정권 실세로 통했던 이재오 의원은 박근혜 정권에 대해 사사건건 삐딱하다. 공개 석상에서 박근혜 대통령 1년 동안 잘한 게 뭐냐?”고 힐난한 것에서부터 당 지도부는 물러나라고 사실상 조기 전당대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국정원 직원의 정치개입 논란이 한창인 시점에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을 경우 처벌을 강화하고 소멸시효를 연장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요즘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 모습을 보면 야당, 그것도 매우 삐딱한 야당 행태 그대로이다. 물론 이런 소신에 찬 행보는 당 내외에서 공감도 얻고 있다.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록 힘은 빠졌지만 그래도 한때를 주름잡던 기개는 남아있어 보인다.




 

사진은 19904월경 민자당 1당 독재 분쇄 및 민중 생존권 쟁취를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매우 긴 이름을 가진 재야단체 집회 모습이다. 1987년 대선분열로 정권교체를 놓친 야당은 민주당과 평민당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나마 재야, 시민단체들이 국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대통합을 진행하던 때였다.


사진 왼쪽부터 장기표 당시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체 의장, 이재오 민주연합추진위원회 대변인, 조춘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차장, 이부영 전교조 부위원장, 정태윤 경실련 기조실장 등 재야 시민단체 지도부가 모여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에 참여했다가 수배 중인 김희선씨(나중에 국민회의 국회의원 역임) 모습도 보인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 대부분은 차분한 자세이지만, 유독 이재오 대변인만 손발을 꼬고 앉은 삐딱한 모습이다. 재야활동 당시부터 그는 원칙과 소신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얼마 후 이들 대부분은 진보정당 재건을 기치로 민중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세력에 나섰다. 이우재(상임대표) 장기표(정책위원장) 이재오(사무총장) 조춘구(대외협력위원장) 정태윤(기획조정실장) 등이 그것이다. 사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김문수 현 경기지사도 당시 민중당 노동위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진보정당 재건을 위한 민중당 실험은 실패했고, 이들 대부분은 1992년 그들이 타도하려 했던 민자당에 투항했다. 또 일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가담하기도 했고, 이재오 의원은 이명박 정권 탄생의 주역으로 실세로 행세하기도 했다.


민중당 출신 정치인들은 특히 박근혜 정권에서 대부분 퇴장하고 있다. 그나마 김문수 경기지사가 차기후보, 김성식 전 의원이 안철수 신당에서 러브콜을 받을 인물로 꼽힐 정도이다. 굳이 꼽으라면 차명진 전 의원과, 허숭 전 경기도 대변인도 있긴 하다.


그런데 이재오 의원이 삐딱하게 박근혜 정권에 각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정치 해설가는 친 이명박과 친 박근혜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흘러간 권력과, 새로운 권력의 갈등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기자는 사진 속의 모습처럼 국민생존권 보장, 자주민주 통일, 국가보안법 철폐 등 자신들이 이루려 했던 초심의 이상을 존중해 주고 싶다. 요즘 세상이 그들이 젊은 시절 이루려 했던 이상과 정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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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치며 한탄할 김근태

■원희복기자의 타임캡슐(46)

땅을 치며 한탄할 김근태

 

1230일이 김근태 2주기이다. 그의 추모식 안내문은 민주주의 안녕하십니까?’라는 의문부호로 시작하고 있다. 이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평생 고생하며 일궈낸 민주화 평화통일 시대가 송두리째 사라진 지금 모습을 보며 김근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근태는 1971년 그 무시무시한 내란음모혐의로 수배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정치 제도권에 들어오기 전까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 공동대표 등 재야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이즈음, 이부영, 장기표, 김근태 3인의 재야 트로이카 시대를 만들었다.

 


                                                        <사진=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사진은 김근태의 한창 시기인 1988년 매주 금요일 저녁 종로성당에서 열린 금요강좌에서 통일문제 강의를 하는 모습이다. ‘80년대 통일운동 평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그의 얼굴에서 40대 초반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그의 강의 주제는 자주·민주·통일을 민중의 힘으로 달성하자는 것이다.


이때 같이 금요강좌 강사로 활동하던 사람이 강만길 고대교수, 송건호 한겨레신문 사장, 이재오 현 새누리당 의원(당시 서울민중운동연합 의장)이다. 김근태의 자신감 있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신 속은 남영동에 끌려가 전기고문, 물고문으로 이미 만신창이 상태였다.


그는 국제적으로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고, 세계의 양심수에 선정됐고, 국내에서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1995년 제도권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 1야당 부총재, 보건복지부장관 등을 지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한창 일을 할 나이인 60대 초반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지론은 자주, 민주, 통일 세 단어로 요약된다. 국회의원이 된 후 남북한 평화공존과 한반도 협력시대라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그게 그거다. 지금 상황에서 김근태의 이 지론은 분명 종북으로 몰렸을 것이다. 당시 재야와 야당은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등을 당당히 사회적 이슈로 제기했다. 그러나 요즘 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의 자도 꺼내지 못하는 형국이다.


하기야 요즘 박근혜 정부는 현역 국회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합법적 노동단체의 합법적 파업에 공권력을 투입하고, 신문사 정문을 해머로 때려 부실만큼 과격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가 부친시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평가한다심지어 국방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1~3월 북한 도발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국정원장은 2015년 무력통일을 시사 하는 발언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통일 얘기마저 종북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됐다. 평화통일 의무는 대통령 취임 시 선서하는 중요한 대통령의 책무인데도 말이다.


이 뿐만 아니다. 지금 정부는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숨진 인사를 추모하는 민주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김근태는 이 민주공원에 누울 수 없다.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민주공원은 탁치면 억하고 현장에서 죽어야만 갈 수 있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한참 후 사망하면 갈 수 없도록 돼 있다.


게다가 이 민주공원 안장근거가 되는 민주화보상법 적용 시점이 1964324일부터로 돼 있다. 시점을 이렇게 잡은 것은 김대중-김종필의 정치적 흥정의 결과물이다. 6987일은 박정희의 3선 개헌 발의일로, 김종필이 실각, 정치적 책임이 없는 시점이다그리고 이 시점은 다시 1964324일로 당겨졌다. 이것은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날로 바로 MB(이명박)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기 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벌어진 1961년 민족일보 사건이나, 5.16 쿠데타 직후 정당 사회단체 탄압, 1차 인혁당 사건 등은 이 법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도 이렇게 누더기인데, 더 무슨 말을 할까.


마석 모란공원에 누워있는 김근태는 지금 대한민국 모습을 보며 땅을 치며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요즘 이 험한 꼴을 보지 않고 간 김근태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해야 하나. 이래저래 추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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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5)

노무현에게 골 지른기자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부림사건 변론 모습을 그린 영화 변호인이 개봉됐습니다. 이 영화에 관객이 몰려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부산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을 고문, 간첩으로 조작한 요즘으로 치면 종북몰이 사건입니다. 이 사건 변론을 통해 노무현 변호사는 인권변호사,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노무현 재단>


사진은 부산지역 인권 변호사로 1987618일 부산 민주항쟁 시위중 사망한 고 이태춘 열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부산 거리를 행진하는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왼쪽)의 모습입니다. 마스크를 썼지만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들의 자세가 비장합니다사실 서울에서도 큰 시국사건이 많았고 인권 변호사가 즐비했던 시절, 지방 부산에서 활동하던 노무현 변호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 어려움을 딛고 중앙정치 무대에서 당당히 대권을 거머쥐었지요. 그럴 수 있던 요소는 뭐였을까요?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기자는 출입기자였습니다. 그때 저는 해양연구원이 러시아 보물선 돈스코이호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특종하는 등 해양수산부를 매우 골치 아프게 하는 기자였습니다20001221일 해양수산부 기자단 망년회 자리였습니다. 당시 해양수산부는 충정로 동아일보사 건물에 있었고, 망년회는 서대문 화양극장(현재는 헐렸음) 뒤 장보고수산센터였습니다. 당시 해양부 회식은 양식어민을 도와야 한다며 횟집, 그것도 비싼 일식집 아닌 막회집에서 했습니다.


그때 노 장관은 백세주를 좋아했습니다. 좀 흥이 나면 백세주에 소주를 탄 ‘50세주를 마셨지요. 그 때 노 장관은 차관이하 주요 실국장을 모두 대동하고 호기 있게 기자들과 백세주를 마셨습니다그때 저는 기자단 간사가 아니었지만 노 장관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노 장관과 안면이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때 술잔이 몇 번이 돈 후 제가 노 장관에게 골지르는 얘기를 했습니다. 마침 그날 아침 민주당 안동선 의원이 김중권 대표를 비난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민정당 출신 김중권을 대표로 임명하자, 안 의원이 집권세력의 정통성이 전혀 없는 인물’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던 인물이라고 쓴 소리를 한 그날이었습니다.


내가 '안동선 의원이 바른 말을 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이 뭐 대단한 감투라고 김중권 대표 같은 사람 밑에서 그러고 있느냐. 그 사람(김중권) 과거 노무현 장관 대우조선 노사분규 3자 개입으로 구속될 때 민정당 법사위원장 아니었냐’ ‘당신의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킨 사람이 바로 그 사람라고 계속 골을 질렀습니다노 장관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한참 듣더니, 덥썩 제 손을 잡으며 술잔을 권하면서 원 동지, 맞소, 나 김중권 같이 기회주의적인 사람 존경하지 않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노무현의 당대표 비난 발언은 바로 저와 노 장관의 대화였던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김중권과 민정당, 심지어 옛날 공화당 후신이던 자민련 세력까지 싸잡아 DJP 연대를 비난했습니다. 다른 기자와 공무원들은 이를 재미있다는 듯 듣고 있었지요그런데 저쪽 구석에 않아있던 동아일보 김동원 기자가 은근슬쩍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 술 먹다 말고 회사로 뛰어가 이 내용을 기사로 썼지요. 저와 노 장관은 이것도 모르고 실컷 정치 얘기를 하고 2차 노래방까지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 장관과 저의 발언은 동아일보 1, 5면에 걸쳐 실렸습니다. 다른 신문도 모두 물을 먹었지요. 정작 나와 노 장관의 대화록이었는데, 내 얘기는 없고 전부 노 장관이 한 얘기로 돼 있더군요. 사실 저와 노장관이 서로 죽이 맞아 얘기한 것이니 동아일보가 오보한 것이라 할 수도 없지요. 물먹은 저는 이 건으로 편집국장에게 크게 혼났습니다. (친한 사람과 마주보고 술 먹으며 한 얘기라도 기사거리가 되면 즉각 써야 하는 것이 기자의 숙명입니다)


이후 오히려 노 장관과 친해졌습니다. ‘장관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라며 빈정거린 기자의 객기에 솔직한 자기 심경을 토로했던 인간 노무현이 훨씬 훌륭했던 것이지요. 아마 노무현이 지방 부산의 한 인권변호사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솔직함' 그것 아니었나 생각됩니다이것 말고 인간 노무현과 다른 여러 가지 인연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밝히겠습니다. 영화 변호인꼭 보십시오.(저는 두 대목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돼지 국밥을 먹고 돈이 없어 도망쳐 바다에서 토하는 장면과 마지막 법정에서 온몸으로 진실을 증거하는 장면입니다)

 


* 참고로 요즘 대통령에 대한 막말 논란이 있는데, 새누리당(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훨씬 심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시 제가 쓴 칼럼을 소개합니다.




<정동탑우리 시대의 마키아벨리

[경향신문]|2003-09-27|06|45|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

흔히 '마키아벨리' 혹은 '마키아벨리즘' 하면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정치를 일컫는 말로 통용된다. 마키아벨리처럼 철저하게 '악의 화신'으로 전락한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그는 수백 년간 모든 악의 근원이며 음흉한 정치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로마교황청은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지정했을 정도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일부계층의 행태도 이와 유사한 느낌이다. 야당과 일부 언론, 극우단체는 노대통령을 모든 국가위기의 원인 제공자이며 혼란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노 정권이 보여주는 국정운영 행태는 과거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어렵다. 청와대라는 권력의 핵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통제력에 익숙한 사람에게 지금은 국정난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동안 학맥과 인맥으로 엮어 알짜 보직을 나눠 챙기던 관료에게 지금의 파격 인사는 졸속 인사로 보일 뿐이다. 뒤로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얻는 데 익숙한 기업은 현 정부가 '미숙아' 정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충격에 위기감까지 느낄 것이다. 검찰이 여당 대표를 잡아 넣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는 정치인에게는 심각한 충격일 것이다. 부정확한 사실로 시대적 공론을 모으기보다 특정 이익을 추구하던 일부 언론의 입장에선 도전이다. 한반도에 전쟁이 재발하건 말건 남북긴장으로 이득을 보던 사람들에게 주변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보일 뿐이다.

이런 사람의 눈에 노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모든 국가위기의 원인 제공자이며 혼란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중세교회가 마키아벨리를 모든 악의 화신으로 규정한 것과 일면 비슷하다.

중세교회가 마키아벨리를 그토록 철저하게 짓밟은 이유는 간단했다. 마키아벨리는 중세 암흑기에서 고대 로마의 찬란한 영광을 르네상스라는 시대조류를 통해 이탈리아에 재건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가졌다. 그 방법으로 권력은 곧 교회라는 당시의 '진리 아닌 진리'에 도전한 것이다.

지금 노정권은 수십년간 우리사회를 지배하던 '진리 아닌 진리'에 도전하고 있다. 그 진리 아닌 진리는 무소불위의 청와대, 살인자를 영웅으로 둔갑시킨 국가정보기관, 정치권력의 시녀 소리를 들었던 검찰, 남북 대결국면으로 이득을 보는 특정세력, 경쟁력 확대보다 정치자금을 통한 특혜에 관심이 많은 기업, 실력보다 학벌이면 출세가 보장되는 사회 등등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은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이런 고질적인 구질서를 혁파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구질서를 혁파하겠다고 달려든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중세 교회에 도전했다가 수백년간 악인으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처럼 구질서의 집요한 저항과 역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도 "아직까지 누구도 지나가지 않았던 길을 택하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의 이 고백은 불행히 적중했지만 그의 시대정신은 궁극적으로 옳았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지금 '현대 정치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행스러운 일은 노정권은 마키아벨리보다 쉬운 싸움을 한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힘을 키우는 방법으로 구질서와 싸웠다면 노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방법으로 구질서와 맞서기 때문이다. 내것을 버리겠다는 데에는 누구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노대통령은 이미 '버리는 승부'에 달관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래서 노대통령을 가리켜 '바보 노무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를 건 대결에서 바보가 아닌 철저히 마키아벨리적이어야 한다. 상대는 여전히 강하고 또 집요하다. 게다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권력자를 앞으로 다시 만들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희복 지방자치부 차장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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