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에 해당되는 글 71건

  1. JP, 회고록 안 쓰나 못쓰나 (1)
  2. 박창신 신부와 지학순 신부
  3. 서청원과 이석기는 동지(同志)? (2)
  4. 심기경호? 비극의 씨앗
  5. 재야시대 다시 도래하나?
  6. 정치신선? 웃기는 소리
  7. 이동화와 박준규의 같음과 다름
  8. '왕실장' 김기춘과 이후락
  9. 28년전 국시파동 주인공의 기개
  10. 윤상현의 우지기관총과 이석기 사건의 BB탄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4)

JP, 회고록 안 쓰나 못쓰나

 

김종필 전 국무총리(JP)1210일 오랜만에 국회에 돌아왔다. 역대 최다선 의원(9) 의원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호를 딴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87JP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된다. 그가 말한 생로병사중에서 생로병까지 왔다는 말은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6년 만에 국회에 돌아온 JP’가 한 이 말은 일면 비장하게 들린다.


그가 이번에 국회에 돌아온 것은 510개월만이라고 한다. ‘돌아온이라는 말은 JP에게 낮설지 않은 단어다. ‘돌아왔다가 익숙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갔다는 말이다. 그의 정치를 자세히 보면 외유를 떠났다 돌아오거나, 정치판을 떠났다 돌아오거나, 결별했다 다시 만나는 등 떠남과 돌아옴이 유독 많다.


1960년 군 하극상 사건으로 강제 전역했다가 돌아온 것이나, 1963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했다가 돌아온 것, 1968년 박정희를 넘보다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것, YS(김영삼)에게 토사구팽 됐다가 복귀해 DJ(김대중)와 연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한번 안보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보는신조를 중시했던 우리 정치문화와 달랐다.

 



사진은 그 유명한 돌아온 JP’ 사진으로 19631023일 김포공항에 내리는 JP와 그 부인 박영옥씨(박정희의 조카 딸)이다. 중앙정보부장으로 한일협정 체결을 지휘하던 그가 자의 반 타의반망명 아닌 외유길에 올랐다 귀국하는 것이다. 부인의 짧은 미니스커트가 인상적이다.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로 국민에게 '충격'을 준 것이 이보다 한참 후인 1967년이다.


돌아온(떠난)’ ‘자의반(타의반)’ JP의 수식어 대부분은 분명하고 명징한 용어가 아니다. 앞서 평가대로 그의 삶이 매우 애매하며, 이중적이며, 심지어 미스터리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그는 국회의원을 9번 했고, 총리, 대권주자로도 꼽혀 완전히 국민들에게 발가벗긴정치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개인적 삶은 지금도 베일에 가린 점이 많다. 충남 부여에서 그의 가족의 삶이나, 해방직후 경성제대 재학 시 활동, 그리고 최고 명문대 학생에서 13연대 사병으로 추락한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육사 입학 후1950년대 미국 유학시절이나, 박정희를 만나 조카사위가 되는 과정도 그렇다.


그는 또 우리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중요하고도 비밀스런 역할을 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민족일보 사건이나, 황태성 사건을 주도한 것에 그는 아직까지 분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유명한 일본 외상 오히라와 한일협정 체결, 이후 3선 개헌이나, 유신을 거쳐 노태우와 3당 합당, 김대중과 DJP연대 등 숱한 현대사의 고비에 대해서도 그 과정을 소상히 밝히지 않았다.


현대사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진 기자에게 JP는 정말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는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나 현대 정치사를 연구하거나 기록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중요 사건을 그가 직접 주도했거나, 최소한 그 핵심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자는 JP는 지금쯤 회고록을 쓰고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사과, 그리고 최소한 후학에게 대한 마지막봉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9번 지내고 국무총리를 몇 번씩 지낸 사람이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물론 솔직한 회고록이 최상이지만 회고록에 자신을 미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회고록을 검증하는 후학들이 있고, 그것은(회고록의 진위는) 자신에 대한 마지막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JP는 매우 실망스런 얘기를 했다.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쓸 얘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일까? 워낙 비밀이 많아 가슴에 묻고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JP는 너무나 단견이다. 회고록은 자신만의 얘기가 아닌 역사의 진실의 규명하고, 빈틈을 메꾸고, 또 풍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공직에 있던 사람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후학들에게, 사회에,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심지어 의무이기도 하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회고록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의무를 방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3)

박창신 신부와 지학순 신부

 

 가톨릭과 박근혜 정권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4저항은 믿음의 맥박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들은 관권 부정선거에 고백하고 대통령의 책임 있는 결단을 촉구했는데 불통과 독선,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는 공포정치의 수명은 길지 않다고 일갈했다.


 그동안 숱한 학생, 교수, 원로들의 시국선언에도 오불관언,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국정을 운영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박창신 신부의 퇴진요구에 파르르 떨며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청와대, 법무부, 보수언론이 난리를 떨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종북구현사제단으로 매도됐다. 이에 사제들은 사제단에까지 이념의 굴레를 뒤집어 씌워 한국천주교회를 심히 모독하고 깊은 상처를 줬다고 비판했다.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는 말은 유신시대 박 대통령의 부친이 자주 쓰던 말이다. 특히 가톨릭 사제에 대한 사법처리는 정권의 거의 막장인 유신시대를 억지로 떠받치던 긴급조치 상황에나 있던 일이다.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지 1년도 안돼 40여 년 전 아버지 시대의 모습을 연출할지 누가 알았을까.


 가톨릭과 박 대통령 집안은 사연이 깊다. 40년전 원주교구에 지학순 주교가 있었다. 그는 유신정권은 무효이며 긴급조치를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하며 박정희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번 박창신 신부와 비슷하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47월 지학순 주교를 내란과 정부전복 단체에 자금을 지원해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구속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그해 911일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은 그래서 생겨났다. 본격적인 가톨릭의 현실참여 운동이 전개됐고, 세계 가톨릭도 동조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물론 로마 교황청도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국내의 저항과 국제적 비난에 직면한 박정희는 결국 지 주교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사진은 바로 지 주교의 석방 당시 모습이다. 주변에 외국인 신부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사태에 로마 교황청이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맨 오른쪽 김수한 추기경의 젊은 모습이 새삼스럽다.

 

 박정희 정권은 실체도 없는 민청학련 사건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조작, 유신정권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호재로 활용했다. 이것은 이후 재심 등을 통해 진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지금 정부는 그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배상을 하고 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에 대한 해산 신청을 하고, 남북교류 단체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는 것은 40년 전 수법 그대로이다. 당시 유신이라는 정통성이 없는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대선 부정선거 논란으로 확산되는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박 대통령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정치를 40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박창신 신부를 구속할 것인가. 사제단은 순교자적 자세로 저항 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한민국 정치는 이제 막장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다. ‘유신독재의 비참한 결말에서 왜 교훈을 얻지 못할까.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1)

서청원과 이석기는 동지(同志)?

 

  7선의 서청원 의원이 광폭의 행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국회 최고 권위자인 강창희 국회의장이 6선이고, 새누리당에서 정몽준 의원과 함께 최다선이니 그럴 만도 하다. 서 의원은 최소한 하반기 국회의장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 연고 없는 화성에 그토록 비난을 무릅쓰고, 그것도 보궐선거로 국회에 들어오려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서청원 의원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5공화국 전두환 정권 시절 어용 야당 민한당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재야 언론인 생활도 함께 했다. 그는 이 시절 정치활동이 금지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만든 민주산악회 기관지인 <자유의 종> 편집인을 지냈고, 김영삼(YS)의 상도동과 김대중(DJ)의 동교동이 처음으로 손을 잡고 만든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기관지인 <민주통신> 주간을 지냈다.

  이런 재야언론은 보도지침이 지배하던 당시 진실을 보도하고, 바른 말을 하는 언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요즘같이 인터넷 언론이 없던 당시에는 <>지와 <자유언론> <다리> <동아정경> 등 재야 정치잡지는 실날같은 진실의 목소리를 전달하던 언론매체였다.

 우리는 해방 42주년을 맞으면서 민주화와 화해의 시대를 맞이하길 기원해 왔다. ‘민주를 부르짖다 감옥에 갇히는 자, 군사독재의 그늘에 신음하는 자, 눈물과 한숨을 짓는 한 많은 가족들이 새 시대를 끊임없이 갈망해온 것이다. 박종철 군의 고문살인, 애국학생 이한열 군의 죽음, 분신자살, 김근태 씨의 용공조작 등 우리는 제5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이래 용공좌경이란 말을 자주 들어왔다.

  민족적 존엄과 자주에의 요구, 통일에의 열망, 사회정의에의 절규가 용공이니 좌경이 될 수 있겠는가. 내 민족 내 국민을 화합에의 대열로 이끄는 것이 용공좌경 행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1986년 자유의 종 편집인으로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폭로해 수감됐다가 출소하는 서청원(한복 입은 이). 출처 <우정은 변치 않을 때 아름답다>



  1987년 민추협 역사를 기록한 <민추사>라는 책에 서 의원이 기고한 글이다. 

사진은 당시 자유의 종 편집인으로 부천서 성고문사건을 폭로했다가 구속된후 출감하는 모습이다.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과 많이 닮았고 글도 이 의원의 다음과 같은 법정 모두 진술과 비슷하지 않은가?

  “종북색깔 공세와 함께 당내 비례 경선을 둘러싸고 저를 조준한 부정선거 의혹이었습니다....하지만 검찰은 저를 기소조차 못하였습니다.”

  사실 서청원 의원과 이석기 의원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두 사람은 대학 재학 중 반정부 시위로 투옥된 전력을 가지고 있다. 50대 초반 초선의원 시절 앞서 글처럼 자주적 통일의 열망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는 것에 강하게 비난하는 글을 썼다. 1980년대 중반에는 좌경용공이나, 요즘 종북몰이는 용어만 다르지 같은 맥락이다. 그러고 보면 서청원과 이석기는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의지를 가졌던 동지(同志)라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청원 의원은 이 글에서 자신의 의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올바른 시민의식과 국가관을 지닌 국민이라면 결코 이 정권에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내 동포 내 조국의 평화를 짓밟는 독재정권에 투쟁하기 위해 언제나 의롭게 살아 숨쉴 것이다.... 내 동포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큰 그릇이 되고자 노력하련다.”

  얼마나 자신감 있는 자기 확신이고, 대 국민 약속인가? 지금 이석기 의원은 저리가라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서 의원이 민족적 존엄과 자주 통일의 열망, 사회정의를 추장하며 정치생활을 했는지는 의문이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서 의원의 이런 다짐은 지켜지지 않은 것 같다.

야당은 물론 많은 시민단체 인사, 학자와 성직자들은 지금 상황을 민주주의의 후퇴를 넘어 유신체제로의 회귀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무분별한 종북몰이는 최악의 남북관계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정치상황에서 여당 최고 중진, 실세로 통하는 서청원 의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거 자신이 쓴 이런 글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최소한 자신이 속한 당의 후배 의원들이 벌이는 종북몰이부터 준엄하게 꾸짖어야 하지 않을까? 그 정도는 돼야 광폭의 정치행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서청원과 이석기의 다름인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가두시위를 벌이는 서청원, 왼쪽은 조희철 의원>



               <민추사에 실린 서청원 의원의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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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경호? 비극의 씨앗

■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40)

심기경호? 비극의 씨앗

 

요즘 정치권에서는 민주주의 후퇴, 과거로 회귀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불행한 것은 재론되지 않아야 할 용어까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심기경호라는 용어이다. 이 말은 1974년 차지철 경호실장이 취임하면서 경호실은 대통령의 신변을 경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심기까지 경호해야 한다며 주창한 것이다. 절대 권력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이 무서운 논리로 차지철 경호실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사진은 바로 그 심기경호의 주인공들이 공교롭게 카메라 한 앵글에 잡힌 모습이다. 1976년 청와대 경호실 훈련장 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란히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람이 전두환 당시 경호실 차장보이다.


사실 전두환은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사람이다. 전두환은 당시 청와대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씨와 잘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차지철 밑에서 심기경호를 빙자한 무소불위의 경호실 권력을 만끽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엊그제,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이 심기경호라는 말이 다시 튀어 나왔다. 지난 1111일 박혜자 민주당 최고위원이 심기경호라는 말을 꺼냈다. 박 최고위원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심기경호의 구체적 예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기경호의 특징은 국가기관의 조직적인 대선개입에 대해서 돌직구를 날린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고 했던 문재인 의원은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고, 선거법을 적용한 채동욱 검찰총장은 찍어내기를 당했다....경찰의 축소 은폐를 제기했던 권은희 과장과 국정원의 추가 범죄를 밝혀냈던 윤석열 지검장은 징계를 당했다. 심지어 파리와 런던에서 시위한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은 대통령을 수행했던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에게 댓가를 치르겠다는 겁박까지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의 유럽순방 중 프랑스 파리에서 시위를 벌인 교포에게 반민주적 발언을 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요즘 심기경호실장으로 뜨고 있다. 사실 이 발언은 논리가 결여된 것은 물론, 무식의 소치를 넘어 프랑스와 외교문제까지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다.


비단 이 뿐일까? 청와대의 심기경호의 시작은 이남기 홍보수석이 윤창중 대변인의 국제적 성추행사건 때 국민에 대한 사과가 아닌 권력자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부터 알아봤다.  당시 홍보수석의 행태는 그의 임무가 국가홍보가 아닌, 권력자의 심기홍보가 우선이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대선 TV토론에서 가장 거세게 박 후보를 몰아세웠던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에게 정당해산이라는 보복조치를 취한 것은 심기경호의 극치이다. 여인네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는데. 박 대통령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법무부가 이런 조치까지 취했을까?


하지만 권력자의 심기를 위무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너무 나갔다. 아무리 권력자의 심기를 경호하더라도 헌법과 시대흐름을 감안해야 하는데, 이건 아니다. 사법부나 헌재를 자신의 의지 대로 할 수 있다는 40년전 사고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심기경호의 종말은 어떠했는가? 박 최고위원은 심기경호가 강화될수록 정권은 민심과 멀어질 뿐이라며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역사의 교훈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최고위원의 이런 지적은 굉장히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심기경호는 잠시 권력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문제해결은커녕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심기경호는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을 투옥시키거나 목숨까지 빼앗는 탄압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런 반민주, 독재는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지면서 스스로 붕괴했다. 심기경호의 주역인 사진 속 박정희, 차지, 전두환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보지 않았나. 


일시적으로 권력자의 마음을 위무하는 심기경호는 분명 비극의 씨앗이다. 부친을 비극으로 내 몬 심기경호라는 단어가 40년 후 딸의 시대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본인은 물론,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다.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9)

재야시대 다시 도래하나?

 

거창할 것도 없지만 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다양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체계, 획일 지상주의를 전체주의라고 부른다1970년대~80년대 재야라는 단어가 있었다. 누가 맨 먼저 쓴 용어인지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 집권자 측에서 보면 이들은 제도권 밖에서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이고, 국민의 입장에서는 양심적이며 선명한 민주화 세력으로 통했다.


물론 이들은 처음부터 재야가 아니었다. 집권층이 각종 불법 혐의를 씌워 제도권 밖으로 쫒아버린 거였다. 해직 교수, 해직 교사, 해직 노동자, 해직 언론인이 양산됐다. 심지어 종교에도 문익환은 재야목사로, 문학에서 박노해는 얼굴 없는재야시인으로 통했다해직 정치인까지 만들었다. 인간사회의 원초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정치까지 제도권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최소한 결사의 자유도 박탈됐다.




사진은 801서울의 봄때 대표적인 재야인사 김영삼, 윤보선, 양일동, 김대중 4(왼쪽부터)이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모임을 갖는 모습이다. 이 자리에 종교지도자 함석헌 선생은 건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의원직에서 제명된 YS, 2공화국 대통령으로 5.16쿠데타 박정희 소장에게 능멸 당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 비교적 진보정당인 통일당을 이끌었던 양일동 당수, 그리고 역시 정치활동을 하지 못했던 DJ, 종교 지도자 함석헌 선생 등 재야 5인 회담은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 사실상 정국의 핵심이었다.


사진속 모임의 계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을 꼽는다. 사태는 1979929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미국 뉴욕 타임스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독재자)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분노,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해 YS의 의원직을 박탈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의회주의자YS는 이때 재야인사 대열에 합류했다. 그해 10월에 있던 이 YS 제명은 곧장 부산 마산지역의 대규모 시위인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결국 10.26 사태, 유신정권 종식의 계기가 됐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자꾸 당시를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해직 기자가 십수년 만에 다시 등장했고, 멀쩡하게 활동하던 전교조를 국제규범에도 없는 억지로 재야 단체로 만들어 버렸다. 정치에서도 대법 판결이 나기도 전에 의원직을 박탈하자는 얘기가 나오더니, 아예 정당을 해산하는 조치까지 추진되고 있다.

생각과 양심이 자기와 다르다고, 마구 제도권 밖으로 내쫒는 시대, 최소한의 결사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시대, 이른바 재야의 시대가 다시 오는 것이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발상, 즉 재야의 시대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30년도 안된 사진 속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 한쪽(사법부)에서는 과거 그렇게 쫒아버린 처사는 잘못이라며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과거사 재심사건을 보면 과거 위정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 재야를 양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들은 책임은 지지 않고, 지금 멀쩡한 국민이 낸 세금으로 그들의 잘못을 배상하고 있다. 십수년 후 지금 위정자들이 저지른 이 잘못은 다시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배상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 때를 대비해 지금 위정자들의 재산을 가압류  해 놓아야 하지 않겠나?


(추신=사진 당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YSDJ는 단일화를 못하고, 전두환씨 쿠데타에 빌미를 줬다. 하지만 YSDJ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통령이 됐고, 나머지 재야인사들은 대부분은 총리, 국회의장 등으로 출세했다)

정치신선? 웃기는 소리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8) 정치신선? 웃기는 소리


 최근 경기 화성 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청원 의원을 보고 ‘정치 신선’이라고 평가한사람이 있다.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이 “7선 국회의원이 되면 정치에서는 신선의 경지”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된 것 같은데, 이는 정치판 물정을 전혀 모르는 소치이다. 

  신선이라면 ‘도를 닦아 인간세계를 떠나 선계의 세계를 노니는 존재’이다. 인간세계와 신선의 세계를 넘나드는 신화의 주인공, 아니면 최소한 정치를 예술처럼 해야 한다. 그런데 서 의원처럼 세속적인 정치판에서 벼라별 잡다한 행위로 별을 둘이나 달고, 게다가 ‘친박연대’와 같은 정당도 아닌 개인 우상조직을 만든 사람을 ‘신선’에 비유하는 것은 정말 넌센스다. 

 기자는 우리 정치판에서 나름 ‘신선’ 처럼 오간 사람으로 박찬종 전 의원을 꼽는다. 한명 더 꼽으라면 바로 남재희 전 의원이다. 두 사람은 바람과 함께 왔다가 사라진, 그리고 세속과 선계를 넘나 든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1979년 12월 민주공화당 정풍운동 모습이다. 앞에 박찬종·남재희·하대돈·유경현 의원(오른쪽부터)이 앉아있다. 모두 40내 ‘젊은 피’ 였던 이들은 ‘박정희 총재’의 공화당 1당 독재에 항의해 정풍운동을 벌였다. 이들의 정풍운동은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났고, 결국 박정희 총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공화당은 몰락했다.

 이후 박찬종 의원은 대권주자에 몇번이나 오르는 ‘바람’을 일으켰지만 결정적인 ‘세’가 없어 번번히 주저앉았다. 그는 ‘정치를 바람으로 한’ 대표적 정치인이다. 삭발도 하는 등 나름 치열하게 정치를 했지만 바람처럼, 신선처럼 정치를 즐긴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가끔 종편에 나와 소신에 찬 논평을 하고 있다. 

 남재희 의원은 이후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장관까지 했다. 그는 매우 진보적인 글을 쓰고, 혁신적 사고를 가졌지만 보수적 정당에서 활동한 특이한 인물이다. 누구 표현대로 ‘몸은 여당에 있지만 마음은 야당’에 있던 인물이다. 지금도 진보적 글과 말을 발표하곤 한다. 기자는 이 두 사람을 ‘세력도 없이, 여야 구분도 없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정치인’ 이른바 정치에서 신선의 경지를 노닐다 간 정치인으로 꼽는다.


 정치판에서는 나름 그 ‘경지’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다. 기자가 한 15년전인가 재미로 구분했던 방법인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던 기준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정치의 최고 경지는 바둑과 마찬가지로 9단이다. 보통 우리가 3김씨를 ‘정치 9단’으로 평가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 

 정치 9단은 정치의 ‘기본 좌판’인 정당을 마음만 먹으면 만들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정당 규모는 적어도 원내 교섭단체(과거 기준 20석)이상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이런 규모의 정당을 허물고, 만들 수 있던 사람은 3김씨 정도이다. 1987년 이후 DJ가 대통령이 된 1997년까지 3김씨가 허물고 새로 만든 정당은 서너개씩은 될 것이다.

 물론 전두환씨도 민주정의당을 만들고, 정주영 회장도 국민당을 만들었지만 이들은 정치가 아닌 ‘총’과 ‘돈’으로 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정치 고수 반열에 끼워줄 수 없다. 물론 3김씨도 지역을 볼모로 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난의 소지가 있긴 하다. 그래도 원내 교섭단체 규모의 정당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정치 9단은 3김씨 이후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음은 8단~7단 반열로 이 사람이 깃발을 들면, 원내교섭단체는 아니더라도 나름 정당간판을 꾸릴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과거 3김씨와 맞선 김상현 전 의원이나 나름 당을 이끌었던 이회창 전 의원, 이인제 의원(과거) 등이 약한 8단 정도 줄 수 있다. 

  현역으로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당권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던 안철수 의원, 번번히 대권문턱에서 주저앉은 정몽준 의원, 차기를 후보군인 박원순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홍준표 경남지사, 손학규 의원 등이 7단 정도라고 할까? 굳이 끼워준다면 서청원 의원도 7선이니 끼워줄 수 있다. 사실 ‘친박연대’라는 조직은 정당이 아닌 특정인물을 ‘사모한’ 거울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수 없다. 자신의 정치력보다 후광을 염두에 둔 조직이기 때문이다.

 6단~5단은 확실한 자신의 정치력으로 나름 계보를 거느릴 수 있는 정치인이다. 적어도 국회의원 한둘이나 시장 몇 명에게 공천을 줄 수 있는 지분을 가져야 한다. 아니면 차기 대권을 노려 볼만한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친박을 거느린 김무성, 친이를 대표한 이재오 의원, 과거 이회창 계보 관리자인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정도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의원이나, 정세균 의원, 김한길 대표 등은 한 6단 정도 줄 수 있다. 

  5단으로는 차세대 주자인 새누리당 남경필, 요즘 뜨는 진영 전 복지부장관 정도이다. 민주당은 안희정 충남지사, 이인영 의원, 박지원 의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도 소수정당이지만 확고한 기반으로 5단 정도의 정치력을 부여할 수 있겠다.

 4단은 여당의 경우 직급만 높은 월급장이 정치인 부류이거나, 야당은 최고위원급이다. 강창희 국회의장이나, 이병석·박병석 부의장도 비슷하다. 총리를 지냈지만 정치력이 낮아 이해찬 의원도 4단 정도이다. 새누리당에서는 원유철, 유정복, 유승민, 원희룡, 오세훈(맛이 좀 갔지만) 야권에서는 박영선, 추미애, 신경민, 우상호, 정청래, 심상정, 노회찬 정도이다.

 3단은 3선 이상으로 당내 기반이 확실하며 상임위원장급이다. 사실 이 정도 오르기도 쉽지 않다. 영남출신 새누리당이나, 호남출신 민주당 의원은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측면에서 정치단수를 높게 평가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도권에서 2~3선을 쌓은 정치인의 정치단수가 더 높다. 

  2단은 적어도 지역구에서 한번이라도 당선된 정치력을 가진 의원이다. 이들은 최소한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난 비범한 인물이다. 비례대표 의원이나, 기초자치단체장은 정치 초단 정도를 부여할 수 있다. 당직자들은 단이 아니라 급이다.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7)

이동화와 박준규의 같음과 다름


 최근 한 육군 장성이 ‘진보’를 ‘종북’ 혹은 ‘패륜’으로 매도하는 책을 써 물의를 빚고 있다. 이상현 5군단 부군단장이 출간한 <종북세력의 주장과 비판>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소장은 “그들이 신봉하는 혁신적 가치인 공산주의 사상을 강요하는 행위를 바로 ‘진보’라 할 수 있다”고 자기 ‘꼴리는 대로’ 진보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이 소장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진보세력’, 이것이 좌익세력이 주장하는 진보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매도하고 “진보는 전통적 가치를 배제하는 부모경시와 같고, 보수는 전통적 가치를 고수하는 부모 공경”이라고 말도 안되는 정의를 내렸다.

 진보를 도덕적 패륜으로 비약시키는 논리전개가 전혀 객관적이기도, 또 합리적이지 않다. 이렇게 인과관계도, 논리의 연관성도 없는 사실을 억지로 꿰맞추는 비논리적 인물이 어떻게 별 둘까지 진급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 사람의 약력을 보아하니 일선 사단장도 했는데, 이런 사람에게 우리의 아들의 군복무와 대한민국 국방을 맡겼다는 것에 간담이 서늘하다.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현대사 사람을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사진은 이동화(사진 왼쪽) 선생과 박준규(사진 오른쪽) 전 의원이다. 두 사람은 1950년대 중반 나란히 경북대 정치학과 교수로 같이 근무해 서로를 잘 아는 사이다. 아마 1961년 7.29 총선에서 같은 대구지역에서 출마했을 때 모습으로 보인다. 머리를 맞대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매우 표정이 진지하다.

 두 사람은 언론인, 교수, 정치인 등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한 사람은 진보의 길, 다른 한 사람은 보수의 길이다. 두 사람의 삶을 살펴보면 진보적 인물과 보수적 인물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했고, 어떤 패악을 끼쳤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우선 이동화 선생은 일제시대 항일 지하운동으로 3년간 투옥된 독립운동가 출신이다. 그는 광복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기를 지냈고, 해방 직후에는 조만식 선생이 운영하던 <평양민보> 주필을 지냈다. 한국 전쟁후 월남해 경북대 교수, 1954년 이후 성균관대, 동국대 교수 등을 지냈다. 이동화 선생은 이 과정에서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1957년에는 민주혁신당 정책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사회대중당 결성에 참여해 61년 대구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이후 이동화 선생은 1972년 대중당 대표 최고의원 권한대행을 지냈으나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완전히 정계를 떠나 저술활동과 민주화·통일운동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진보적 인물로 진보분야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에 비해 박준규 전 의원을 보자.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보수정객이다. 그는 젊은시절 미국에 유학한 후 귀국해 <부산일보>사장, 경북대 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호시탐탐 정계진출을 노렸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대구 달성군에 두 차례나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결국 4·19혁명이 나고 5대 국회에서 보수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대망의 금배지를 달었다. 사진에서 이동화는 낙선, 박준규는 당선된 것이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그는 잽싸게 공화당으로 당을 갈아타 서울과 대구에서 내리 당선, 6선을 기록했다. 박 전의원은 이후 12·12 쿠데타 세력의 민정당으로 들어가 1990년 대망의 국회의장이 됐다. 1992년 14대 국회의장에 연임됐으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처음 도입한 재산공개 파동에 휩싸였다. 재산공개 결과 그는 호화 빌라는 물론 전국적으로 무려 70채나 되는 서민아파트를 가지고 서민의 등골을 빼먹는 파렴치한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김종필의 자민련으로 자리를 옮겨 김대중-김종필 공동정부에서 다시 국회의장이 되는 천수, 만수를 누렸다. 그는 9선이라는 우리나라 최다선 기록(김영삼, 김종필과 공동)을 보수노선으로 일관하면서 양지바른 곳에서 살았다. 

 언론인 출신에 대학 교수를 거쳐 진보적 정치노선을 걸어온 이동화 선생은 평생 금배지를 달지 못하고, 허름한 안암동 서민아파트에서 생을 마쳤다. 그러나 후학들은 그를 높이 평가해 여러 전기·평전 등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역시 언론인, 같은 대학출신으로 보수 정치노선을 걸어온 박준규 전 의원은 9선에, 국회의장 3번이라는 전무후무한 정치적 영달을 누렸다. 그리고 70채의 서민아파트를 챙긴 거부로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정치적 영화를 누리고, 재산을 가졌지만 그를 기억하거나, 기리는 사람은 없다.

 우리 현대사는 진보와 보수를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어떻게 사느냐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나는 내 자식에게 양지만 쫒으며 치부하지 말고, 양심을 지키며 소신껏 살라고 가르치고 싶다.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6)

‘왕실장’ 김기춘과 이후락


 박근혜 정부에서 최고실세는 ‘왕실장’이라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 왕실장은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요즘 그의 위세는 총리는 물론, 국회의장, 대법원장보다 높아 보인다. 그는 얼마전 자신의 이런 평가가 부담스러웠는지 “나는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승지(承指)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달라진 정국을 보면 그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용준 총리후보 인사에서 어긋나기 시작해 김동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김병관 국방부장관 내정자 등을 통해 망사(亡事)가 됐고, 윤창중 대변인 추행으로 정점을 찍었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검찰은 국정원과 경찰의 대선개입 의혹을 수사하고, 전직 국정원장을 구속했다. 거리에는 ‘불법 선거 무효’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새정부는 출범도 하기전부터 비틀거렸고, 위태롭게 지탱했다. 

 그런데 ‘왕실장’이 부임하지마자 정국은 180도 바뀌었다. 대대적인 전쟁위기설이 전개되더니 ‘종북몰이’ 광풍이 몰아쳤다. 매카시즘 광풍에 보수 야당은 고개를 숙이고, 준(準)진보정당마저 스스로 ‘진보’자를 벗어 던졌다. 모두 ‘나는 이석기를 싫어해’라고 자아검증을 선언해야 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사상과 양심의 자유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른바 진보언론도 속수무책이었고, 오히려 더 매카시즘 광풍에 함몰됐다. 

 사정기관 최고 책임자를 ‘혼외자식’ 문제로 간단히 정리하고 드디어 모든 길을 청와대로 통하는 40년전 ‘질서’로 회귀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던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한 명의 교체로 정국을 180도 반전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대단한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왕실장의 대표적 인사를 꼽으라면 두말없이 이후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꼽는다. 사진은 이 비서실장의 한 50년전 모습이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1961년 장면 총리 직속 정보연구실장 시절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 만주에서 하사관 교육을 받은 이씨는 해방후 군사영어학교를 통해 군인의 길에 들었다. 박정희씨가 만주육사를 나온 것과 일면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5·16 쿠테타 이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을 거쳐 민정이양 이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무려 6년간 지냈다. 당시 최고 실세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자신이 육본 정보국에서 ‘쫄따구’로 데리고 있었으니 그 파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락씨의 청와대 비서실장 6년 재임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이라 이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비상하고 입이 무거운’ 이후락 실장은 사실상 국정 전반을 요리했다. 나중에 북한에 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담인데 그 동생 이거락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스캔들인 정인숙 사건을 처음 수사한 마포경찰서장이었다. 한 23년전 기자는 정인숙 사건을 취재한다며 부산에 살고 있는 이거락씨의 집앞에서 인터폰 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다. 그 때 아파트 인터폰으로 ‘정인숙 사건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라고 질문하면 ‘할 말이 없어요’라며 뚝 끊고, 다시 인터폰을 누르고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왕실장인 이후락 이거락 형제는 박정희 시대 정치·남북관계는 물론, 스캔들에 관해서도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후락씨는 이 비밀을 고스란히 안고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도 부친처럼 ‘왕실장’을 통한 통치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 지금까지 박근혜식 정치 스타일에서 달라진 모습이다. 바로 이것이 차이점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은 부친의 ‘거사를 같이 한 동지’라는 의미와 또 다르다. 단지 ‘옆에 있다’는 물리적인 거리일 뿐이다. 이는 지구 반대편 사람과 전화, 인터넷, SNS 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공간적 거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금보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천하의 왕실장도 자신의 이런 한계를 알고 있을까?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35)

 28년전 국시파동 주인공의 기개


 “우리나라의 국시(國是)가 반공입니까?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발언을 요즘 현역 국회의원이 했다면? 아마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비슷한 ‘종북주의자’로 치부돼 국가보안법 혹은 반공법, 조금 심하면 내란죄 예비음모로 구속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발언은 정확히 28년전인 1986년 10월 13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유성환 의원(신민당 경북 칠곡)이 한 발언이다. 물론 유 의원은 이 발언으로 현역의원 신분으로 구속되는 이른바 ‘국시파동’의 주인공이 됐다. 이 국시파동은 현역의원의 불체포·면책 특권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이 사건은 전두환 군부독재 시대, 박정희의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라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어진 우리사회의 금기를 깨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얼마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 모습은 28년전 바로 이 신민당 유성환 의원의 구속모습과 너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역의원이 국정원(당시는 안기부) 요원에 의해 수갑이 채워져 거칠게 몸싸움을 하며, 구호를 외치면서 연행되는 모습이 너무 닮았다. 그 때와 다른 점은 전두환이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안이 여당 민정당만의 날치기로 처리됐다면, 이번에는 야당도 동의해줬다는 점이다.




 사진은 구속된 유 의원이 수의를 입고 법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아마 이석기 의원도 이렇게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이 곧 언론을 통해 공개될 것이다. 아마 다른 점은 요즘은 법정에서 수의를 입지 않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이라고 할까.

 국시파동이 일어난 당시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은 직선제 개헌 요구로 정권이 막바지에 몰렸었다. 대학가는 시위로 점철됐고, 이를 탄압하기 위한 공안몰이와 종북논란이 이어졌다. 국가 정보기관은 공공연히 정치에 개입하고 심지어 언론인에 대한 테러까지 자행할 정도였다. 서울 강남에 출마했던 신민당 홍사덕 의원(박근혜 대통령의 친박 핵심으로 최근 민화협 의장에 임명)에 대한 흑색선전물이 지역에 뿌려지기도 했다. 요즘 채동욱 검찰총장의 숨겨진 자식이 공개되는 것과 일면 비슷했다. 사실 홍 전 의원은 국가정보기관 공작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유성환 의원은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9개월여 수감생활을 했다. 그리고 보석으로 풀려나와 재판을 받았다. 고등법원은 유 의원의 발언은 면책특권에 해당된다며 무죄판결했고, 1992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결국 현역의원을 구속한 국시파동은 전두환 정권이 국면타개를 위한 공안몰이 혹은 종북몰이로 드러났다. 이 국시파동 판결은 근대 사법 100대 판결중 하나로 꼽는 중요한 판결이다. 

 하지만 주인공 유 의원은 이 발언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는 등 그와 야당 신민당이 당한 피해는 어디서도 보상받지 못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유 의원은 한참후인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됨으로 겨우 정치적 사면을 받았다. 

 유 전 의원은 지난해 자신의 책 출판을 앞두고 한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모든 정책, 사회 기풍, 모든 역량을 통일에 집중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화해는 통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꼴보수’ 본산으로 통하는 대구·경북(칠곡) 출신 70넘은 노정객의 통일에 대한 안목과 용기는 지금 고향 후배들이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 이석기 의원 사건 이후, 매카시즘·종북논란이 다시 공개를 들고 있다. 이번에 구속된 이석기 의원이 18년전 유성환 의원 사건의 전철을 밟을지는 사법심사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한 매카시즘, 종북논란을 숱하게 보아온 우리들이 우려하는 것은 이 과정에서 매몰되고 침해되는 사상과 양심·결사의 자유, 즉 우리의 기본권이다. 



■원희복기자의 타임캡슐(34)

 윤상현의 우지기관총과 이석기 사건의 BB탄 


 전두환씨가 결국 안내고 버티던 추징금을 내기로 했다. 처남을 구속하는 등 검찰의 집요한 추적에 두 손을 든 것이다. 알고 보니 전씨 자식들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출판사를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문화사업을 하는줄만 알았던 장남은 골동품에 미술품까지 손을 댄 사업가였고, 별 직장생활을 않은 두 아들은 엄청난 부동산과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전씨의 장남 재국씨는 검찰청사 앞에서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 미납추징금을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장남 재국씨의 검찰청사 앞 사과성명을 보니 25년전인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씨의 연희동 골목 사과성명이 생각난다. 당시 전씨는 자신의 재산 139억원을 헌납하고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갔다. 




 사진은 당시 백담사 주지인 도후 스님과 이야기 하는 전씨 부부의 모습이다. 그때 전씨의 백담사행으로 많은 기자들이 고생했다. 백담사 입구 강원도 용대리는 기자들이 몰려와 숙박시설이 동이났고, 결국 대부분 다방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특히 사진기자들은 전씨 부부 사진을 찍기 위해 백담사 뒷산에서 한겨울에 야영을 했다.

 그 때 전두환씨의 백담사행은 새로운 권력자 노태우씨와 쇠락한 권력 전씨의 치열한 막후 ‘전쟁’결과였다. 이번 검찰과 전씨 일가가 미납추징금 싸움은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치열했다. 노태우씨의 권력편에는 박철언 청와대 정책비서관, 최병렬 정무수석, 이원조 의원이 있었다. ‘난로불이 꺼진 것은 난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안다’라는 말이 있듯이 꺼지는 권력 전씨측에는 가족과 몇몇 측근밖에 없었다. 당시 전씨와 끝까지 함께했던 사람은 안현태 경호실장,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이양우 변호사 세 사람이다.

 기자는 안현태 전 경호실장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취재한 적이 있다. 그 때 전씨측을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주변을 조여오는 일종의 가지치기였다. ‘통큰 스타일’의 전씨측으로선 아주 괴로웠던 것이다. 그 때 가장 울분을 참지 못한 사람이 바로 전씨의 사위 윤상현(현 새누리당 수석부대표)씨였다. 알다시피 윤씨는 현직 대통령의 딸과 85년 6월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초의 사람이다. 물론 지금 윤씨는 전씨의 딸과 이혼, 전씨의 사위가 아니다.

 특히 윤씨는 어제만 해도 장인 밑에서 굽신거리던 사람이 등뒤에 비수를 꽂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윤씨는 안현태 전 실장에게 ‘이렇게 당하느니 우리도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우지기관총을 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우지기관총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용하던 성능이 매우 좋은 이스라엘제 소형 기관총이다. 청와대에서 이 기관총을 많이 본 윤씨가 한 정 구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안 전 경호실장은 “쓸데없이 객기 부리지 말라”고 혼을 냈다고 한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예비 음모 사건에서 녹취록에 장난감 모의 총인 ‘BB탄을 개조해 싸우자’고 한 대목에 국민들이 경악했다. 녹취록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 BB탄 발언은 이석기 의원이 아닌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의 발언이다. 녹취록 발언 맥락도 전쟁 발발전 미리 구금하는 ‘예비검속’ 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6·25때 이 예비검속으로 구금한 수십만 명을 재판없이 처형한 것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다. 이 보도연맹 사건은 공권력의 남용으로 드러나 현재 국가가 배상하고 있다.

 어찌됐든 이런 기준에서 보면 이석기(실제는 이상호 고문) 내란예비 사건에서 장난감 BB탄을 개조하자는 것보다 윤상현씨가 청와대 경호실에서 사용하는 우지기관총으로 대항하자는 것이 훨씬 더 충격적 아닐까? 똑같은 말뿐인데 장난감 BB총보다 실총인 우지기관총으로 정부에 맞서자는 것이 훨씬 내란의 현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내란예비 사건의 공소시효는 어떻게 되나 모르겠다.

 지금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당에 전달하는 창구격인 ‘실세중 실세’라고 한다. 특히 윤 의원은 ‘우지기관총을 달라’고 했던 것처럼 새누리당 강경파를 주도하고 있다. 윤 의원은 이석기 의원 구속을 주도하며 과거 자신의 행동이 생각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