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얼마 전 상징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을 비롯해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재계인사 21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것이다. 청와대는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해 기업인을 격려하는 자리라고 했지만 주목되는 것은 이재용, 정의선, 조현상 등 재벌 3세들의 참석이었다.

이들이 메세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어 초청 명단에 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재벌 3세가 한꺼번에 청와대에 공식 초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지난 연말부터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으로 재벌 3세의 이미지는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청와대가 유력 재벌 3세를 청와대로 부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재계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재벌의 3세 경영승계를 승인했다”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나왔다. 즉 ‘재벌의 승계를 용인하겠으니 경제활성화를 위한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서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영어사전에 ‘재벌(CHAEBOL)’이라는 단어가 오른 것은 오래전 일이다. 대통령이 재벌에게 일자리 창출을 당부하는 것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아무리 일자리 창출을 부탁해도, 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해도 사내유보금으로 수백조원씩 쌓아두고 꿈쩍 않는 재벌에 대해 이제 정부는 ‘을’의 입장이 된 것이다. 재벌은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성장했지만, 이제 정치권력이 오히려 사정을 해야 할 정도의 위세를 가진 것이다.

대구 서문시장 한쪽에 꾸며진 삼성상회 터는 한국 재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재벌은 ‘갑’ 정부는 ‘을’이 된 시대
대구시 인교동 61-1번지. 대구 서문시장 한편에 옛 건물을 부조식으로 만든 조형물이 서 있다. 주변은 조그마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이 바로 ‘삼성의 발원지’ 삼성상회 터다. 우리나라 최대 재벌기업인 삼성이 태어난 곳이다. 한국 재벌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삼성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철물·공구·오토바이 등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시장 한쪽에 조형물과 벤치 몇 개가 있어 노인들이 쉬는 장소로 활용될 뿐이다. 인근에 있는 이병철 창업주 고택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한옥집인데, 지금은 삼성과 무관한 일반사람이 살고 있다. 이곳이 삼성의 발원지라면 삼성이 만든 조그만 기념관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도 없다. 삼성상회 터에는 이런 안내판이 있다.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전, 호암 이병철 회장(1910~1987)은 사업 구상을 위해 수개월에 걸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국내 여러 도시와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아본 끝에 소자본으로도 승부를 걸 수 있는 무역업을 선택하고 1938년 3월 1일, 대구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서문시장 한편에 ‘주식회사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사실 이병철 회장이 첫 사업을 시작한 곳은 대구가 아닌, 경남 마산이었다. 경남 의령의 갑부집 막내아들이던 이 회장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후 1936년 마산에서 동업자 두 사람과 협동정미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업이 잘돼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은행 대출이 중단되면서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첫 사업에 실패한 이병철은 중국 대륙 특히 만주, 베이징, 상하이를 둘러봤다. 당시 이곳은 치열한 국공내전이 벌어지거나, 난징학살 등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전장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을 돌아본 당시 이병철의 ‘배포’도 대단했다. 그리고 다시 사업을 시작한 곳이 바로 경부선 철도와 국도 등 교통이 좋아 상업의 중심지였던 대구 서문시장이다. 이병철은 이곳에서 대구 근교의 청과물과 동해안의 건어물을 모아 만주와 베이징 등지로 수출했다. 지금 삼성물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회 건물 1층에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기와 면을 만드는 제면기를 갖추어 국수를 생산했다. 그때 만든 국수 상표가 ‘별표국수’로 삼성 최초의 제조업이다.

 

 

삼성상회 터 인근에 있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 고택. 이건희 현 삼성전자 회장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오른쪽 사진은 옛 삼성상회 모습

 

 


청과물과 건어물 모아 중국으로 수출
한국의 재벌이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해방이었다. 대구 서문시장의 삼성상회도 1948년 서울로 옮긴다. 해방 직전까지 우리나라 토착 기업은 화신백화점 설립자 박흥식과 호남의 대지주로 경성방직 창립자 김연수(동생 김성수는 동아일보 사주), 김영준의 천일고무 등 대여섯 개가 고작이었다.

해방 후 많은 신흥재벌이 등장했다. 바로 ‘적산기업 불하’라는 기회를 통해서였다. 적산(敵産)이란 ‘적의 생산시설’ 즉 일본인 소유 기업을 해방 후 정부가 압수한 것을 말한다. <한국기업성장사>를 쓴 박상하는 “해방 직후에도 꽤 많은 산업시설이 남으면서, 적산으로 분류된 기업의 수만 2700여개를 헤아렸다”면서 “당시 기간산업으로 지정된 대부분의 대기업은 모두가 적산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2700여개 적산기업은 일반에 ‘헐값으로’ 불하(매각)됐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정치적 특혜가 난무했다.

당시 상황을 박상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다. 저마다 승부욕이 넘치는 얼굴로 어떻게든 줄을 대기 위해 머리통이 깨져라 몰려들면서 브로커가 날뛰고 정치권력이 춤을 췄다. 다 그런 건 아니라지만 브로커든 정치권력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 연고권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 하루아침에 새 주인으로 등장했다.”

이때 일제의 소화기린맥주는 박두병에게 불하돼 동양맥주, OB맥주를 거쳐 지금의 두산그룹 모태가 됐다. 방직공장 선경직물은 직원인 최종건이 불하받아 지금의 SK로 발전했다. 정주영이 불하받은 조선이연금속 인천공장은 인천제철을 거쳐 현대제철로 성장했다. 조선제련을 불하받은 구인회는 공장을 화학분야로 변경해 금성, 지금의 LG그룹 씨앗이 됐다. 조홍제가 불하받은 조선피혁은 지금의 효성그룹 모태가 됐고, 김수근이 받은 조선연료, 문경탄광은 지금의 대성그룹으로 컸다.

소야전시멘트 삼척공장은 동양그룹의 모태가 됐고, 천야시멘트 경성공장은 벽산그룹의 뿌리다.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꿔 1957년 동방생명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동방생명이 1963년 삼성생명에 인수되면서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이 밖에 이름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적산기업이 민간으로 넘어갔다. 재무부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60년까지 법인대장 기준으로 귀속기업체(적산기업) 2061개가 불하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1951년 413건, 52년 361건, 54년 282건, 55년 138건 등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집중적으로 불하됐다. 지금 재벌 대부분은 이때 적산기업을 직접 불하받거나, 불하받은 기업을 다시 인수하는 방법으로 성장했다.

심지어 자본을 축적한 재벌은 언론계를 거쳐 직접 정계로 진입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쌍용의 창업주 김성곤이다. 김성곤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재정부장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동경방직 방적기 2000추를 불하받아 금성방직을 설립했다. 금성방직으로 돈을 번 김성곤은 1952년 4월 동양통신을 설립, 언론계에 진출했다.(이한구 <한국 재벌사>)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서 공화당 재정부장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쌍용그룹을 일궈냈다. 김성곤은 불하받은 재산으로 축적한 부를 언론과 정치에 접목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니까 이승만 시대에는 정치적 문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제적 특혜로 훗날 거대 재벌로 자라날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런 기조는 박정희 시대에도 계속됐다. 수출보국 정책은 재벌의 종합상사에 큰 특혜를 줬고, 특히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는 부채에 허덕이던 재벌에 단비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 등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다. / 청와대 사진기자단

 

 


정경유착의 뿌리 위에서 성장한 재벌들
이 정경유착의 뿌리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왜 재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라는 책을 쓴 이동연에 의하면 “전두환 정권은 율곡사업과 차세대 전투기사업 등의 특혜를 주며 삼성에서 220억원, 그 외의 재벌들로부터도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받았다”면서 “특혜와 정치자금은 전두환 정권과 재벌의 공생방식이었다”고 평가했다.

1997년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적잖은 재벌이 사라졌지만, 재벌은 이 기회를 통해 스스로 생존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진화한다. 역설적으로 IMF 체제는 제도금융과 권력으로부터도 ‘안전한’ 재벌로 성장하는 내성을 키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 재벌은 국가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힘이 세졌다. 재벌은 ‘사정의 칼’을 제외하고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그렇게 성장한 재벌에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참여정부 시절 한 고위 인사는 “재벌을 무한정 사법처리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면서 “그래서 편법으로 치부한 부를 사회환원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리는 작업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력과 재벌권력 사이 일종의 타협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재벌권력 사이에 힘의 역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했고, 이명박 정부는 아예 법인세를 감면해주는 등 재벌에 영합하는 정책을 폈다.

국가경제가 몇몇 재벌에 좌지우지되는 재벌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발걸음도 빨라졌다. 2012년 김종인은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제안했다. 김종인은 ‘대한민국은 재벌공화국’이라고 규정하면서 “경제민주화란 한마디로 재벌(거대 경제세력)이 나라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또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공생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경제민주화”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김종인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정부의 ‘보이는 손’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재벌 한 사람이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수십 개의 계열사를 지배하면서 독단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됐다.

보수여당 대통령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이 제시한 이런 대안과 공약에 국민은 환호했다. 그리고 바로 이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지금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앞서 얘기한 대로 재벌 3세를 청와대로 초청, 3세 승계를 용인하는 듯한 모습만 연출했을 뿐이다. 광복 70년의 유산은 그렇게 모질고 질기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