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5년 전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지금의 창원)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시신이 떠올랐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민의 시위를 경찰은 최루탄과 총격으로 강경진압했다. 주춤하는가 했던 시위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 4·19 학생혁명의 기폭제가 된 것이 이 시신이었다.

김주열군의 어머니 권찬주씨는 27일 동안 아들을 찾아 헤매다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아들 앞에서 오열했다.

김주열 열사와 학교 동기생인 정순구씨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얼굴에 못이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는 소문이 마산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다. 고기잡이 배로 건져올린 김 열사의 주검이 누워 있던 장소는 지금의 합포구청과 창원지검 마산지청 사이에 있던 작은 연못 부근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더니 짚으로 된 거적이 깔려 있었다. 거적을 들췄더니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주열이가 보였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마산항 중앙부두에는 이곳을 ‘혁명이 바다에서 솟아오른 곳’으로 표현하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민주화운동 장소 문화재로 첫 지정
마산 중앙부두 세 번째 포트(쇠말뚝)가 바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인양된 곳이다. 이곳에는 “역사는 이 바다에서 4월혁명의 횃불로 솟아올랐던 것이다”라는 동판이 설치돼 있다. 또 주변에는 김 열사의 얼굴에 박혔던 최루탄과 같은 종류의 최루탄과 함께 ‘추모의 벽’ 옆에 ‘4월혁명의 발상지’라는 표시를 해놓았다.

2011년 9월 경남도는 이곳을 경남도 기념물 제277호로 지정했다.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관계자는 “경찰이 3·15 시위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열사를 돌에 매달아 수장시킨 것”이라며 “민주화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3·15 의거의 발상지는 3월인데도 썰렁했다. 이곳으로 가는 통로는 자물쇠로 잠가 일반인이 자유롭게 현장에 접근할 수조차 없다. 대로에서 이곳으로 안내하는 변변한 안내판도 없다. 중앙부두는 지금 행정선 몇 척만 접안하고, 주변은 물류창고와 야적장, 주차장으로 변해 어수선한 분위기다.

55년 전 이맘때로 되돌아가보자.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부정선거는 선거 1년 전부터 최인규 내무부 장관의 지휘 아래 치밀하게 준비됐다. 당시 상황을 국립 3·15 민주묘지 기념관에서는 이렇게 정리해놓고 있다.

“전국 경찰 주요 간부를 맹목적 충성인물로 교체하고, 야당의원들에 대해 집요한 분열공작을 펼쳤으며,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일반 공무원들은 물론 교육공무원까지 부정선거 운동에 투입되어, 담임교사가 가정방문을 통해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권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선거 한 달 전인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미국 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거했다. 이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후보로 당선이 확실해졌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이때 마산에서는 한 변절 정치인이 시민을 분노케 했다. 야당인 민주당으로 당선된 허윤수 의원이 1월 5일 자유당 공천을 약속받고 탈당한 것이다. 자유당의 정치공작 결과였다. 마산 시민은 자신들이 찍어준 민심을 저버린 허 의원과 자유당에 격분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항 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참혹한 시신.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학생과 시민을 향한 경찰의 총탄
자유당에 반발한 첫 민주화 시위는 대구에서 일어났다. 1960년 2월 28일 대구 수성천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 유세가 있었다. 정부는 일요일인데도 공무원을 출근시켜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했다. 학생들도 임시수업, 시험, 영화감상 등의 구실로 등교시켰다. 이에 분노한 경북고등학교 대표 이대우가 “학원의 자유를 달라” “일요 등교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최초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이었다. 이것이 바로 2·28 민주운동이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시민들이 드디어 폭발했다. 이날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보자. 오전 10시30분 부정선거를 보다못한 민주당 마산시당이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30여명은 거리 시위에 나섰다. 오후에는 시위대가 600여명으로 늘었다. 경찰과 대치하면서 투석전이 전개되고 시위를 주도하던 민주당 간부가 연행됐다. 6시30분 시민과 학생들이 개표가 진행 중인 마산시청 앞에서 부정선거 항의시위를 벌였다. 북마산파출소가 불에 타고, 변절한 허윤수 의원의 집이 파괴됐다.

오후 8시10분, 마산시청 앞과 남성동파출소 앞, 북마산파출소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카빈총을 발포했다. 김영호·김효덕 등이 총탄에 사망하고,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시위는 마산 전역으로 확산돼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날 경찰은 권총은 물론, 카빈총, 신형 알루미늄 최루탄 등을 무자비하게 발포,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1년 당시 상황을 지현모는 <마산의 혼>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3월 15일 밤 경찰의 무자비한 발포가 자행되었으며, 다음날 경찰은 공포탄을 쏘았다고 발뺌했지만 살상을 목적으로 사람의 가슴과 머리를 겨냥해 발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부정선거 물리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일어난 마산의 학생 및 시민들에게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기에 이르러 이 고장에서 처음으로 7명 이상의 피살자가 생긴 것이다. 경찰은 이들에게 무지무지한 고문으로 보복하였고, 또 이들에게 공산당 누명까지 씌우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게 바로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는 발언이다. 이기붕은 18일 오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3·15 선거는 “공명선거였다”면서 “총을 줄 때는 쏘라고(‘쓰라고’라 들은 사람도 있다)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동아일보 3월 20일자)

경찰의 무차별 총격 진압으로 시가전을 치른 듯한 마산 시내는 실종된 아들·딸을 찾아 헤매는 부모들로 가득했다. 야당은 긴급 회의를 열고 ‘선거무효’를 선언했다.

창원시 회원구 애기봉 아래에 위치한 국립 3·15 민주묘지에 세워진 ‘민주의 탑’ ‘정의의 상’

 


참혹하게 떠오른 시신, 혁명의 기폭제
이런 분위기에서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다.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 앞에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몰려들었다. 다시 시위가 시작됐다. 마산에서만 3만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마산시청, 마산경찰서, 창원군청에 시위대가 진입하고 경찰서장 지프차가 불에 탔다. 경찰의 발포로 또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튿날 마산 시내 8개 남녀고교가 일제히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는 13일까지 계속됐다. 이를 2차 마산 3·15 의거라 부른다.

마산 시위는 인근 진해, 부산, 그리고 서울로 확산됐다. 드디어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000여명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4월 19일에는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이승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위에 가세하자 이승만은 하루 만인 4월 26일 드디어 하야를 발표했다.

4·19 학생혁명은 이렇게 완성됐다. 4·19 학생혁명의 의의와 역사적 가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마산(창원)을 민주화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학생혁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국무총리가 직접 참석하는 기념행사가 열리고, 연간 36만명이 찾고 있다.

김주열 열사의 묘.

 

 

 


창원시 구암동(마산회원구 3·15성역로 75) 애기봉 아래에 ‘국립 3·15 민주묘지’와 ‘3·15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민주묘지는 마산 1·2차 민주화 시위에서 희생되거나 부상당한 인사들이 안장된 곳이다. 1998년 마산시가 처음으로 조성했는데,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현재는 국가보훈처가 관리하고 있다. 현재 37기가 안장돼 있고, 3·15 의거와 4·19 혁명 부상자, 사망자 등 80기까지 모실 수 있다. 여기에 있는 ‘김주열 묘’는 가묘로 시신은 고향 전북 남원시에 안장돼 있다.

3·15 민주묘지 건상곤 관리사무소장은 “연초에 관내 기관장의 참배를 시작으로 3월 3·15 유족 추모제, 5월 기념행사 등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의 소풍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묘지 주변은 ‘민주의 탑’과 ‘정의의 상’ 등 각종 조형물이 가득하다. 특히 3·15 기념관은 12년 만에 내부를 전면 수리하고 최근 새롭게 개장했다. 3·15 의거를 시간 순, 상황 순으로 정리했다. 특히 당시 발포했던 최루탄과 권총, 카빈총을 소재로 형상화한 예술작품이 돋보였다.

건상곤 관리사무소장은 “건물 전면에 3·15 의거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하고, 영상관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면서 “최신 그래픽과 동영상 시설을 갖춘 사이버 추모관은 어린이들에게 좋은 교육관, 체험학습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3·15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서려는 순간, 액자 하나가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우리의 짙푸른 마산 앞바다를/우리의 마산 앞바다의 민주주의를/우리의 주린 자유를/독재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만/우리의 벅찬 정의의 대열을 기억해야 한다/그리하여 하나의 탑이 된/피어린 열망인 민주주의의 기억을 우리의 현재로 불러와야 한다’(고은 시인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중에서)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