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8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됐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에서는 미군, 북에서는 소련군이 일본의 무장해제를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38선 분할에 대해 정치학계에서는 많은 논란과 연구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미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에서 근무하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이 8월 10일 자정 무렵 30분 만에 선을 그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딘 러스크가 회고록에서 ‘자랑’하면서 드러났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38선을 미군의 영관급 장교 두 명이 30분 만에 획정했다는 사실은 38선이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그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 국가의 운명을 이렇게 손쉽게 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남한 우익진영과 미국 일부 언론이 제기한 얄타 밀약설, 1945년 7월 포츠담 밀약설, 일본이 38선 분할을 유도했다는 일본 음모설 등이 있다. 최근에는 38선 분할은 미 육군부 작전국 전략정책단 헐 중장과 링컨 준장이 결정했다는 주장이 있다.(이는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에 자세히 언급돼 있다)

8월 24일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북한 평양에 들어와 25일 포고문을 발표했고, 남한에는 9월 6일 미군 제24군 소속 선발대가 인천항으로 들어와 다음날인 7일 맥아더 원수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남한은 미군정, 북한은 소련군정이 실시됐다.

 

 

 

도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군사분계선. 사진 왼쪽 인공기가 세워진 북한 기정동 마을과 사진 오른쪽 태극기가 게양된 남측 대성동 마을 중간에 군사분계선이 있다.

남과 북 경계초소 사이로 갈대와 듬성듬성 관목만 있을 뿐 군사분계선 팻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강대국 편의에 의해 그어진 민족 분단선
8월 27일 남북을 오가는 철도 운행이 중단되고 남북을 오가는 도로 38선상에 ‘38선 팻말’과 함께 차단기가 설치됐다. 하나였던 한반도 허리가 잘리고,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 181개의 우마차 도로,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전천후 도로, 8개의 큰 차도, 6개의 철로가 단절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하기로 결정하자 남북은 찬성과 반대로 분열됐다. 해방정국의 대립 전선은 민족세력과 친일세력에서 엉뚱하게 찬탁 대 반탁, 좌익 대 우익으로 갈라졌다. 우익과 좌익 세력은 각자 남북 각자의 정부 수립에 나섰다. 38선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선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여운형이 38선을 넘어 북한 김일성을 만나 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됐다.

이런 가운데 다시 백범 김구와 김규식이 나섰다. 김구는 1948년 4월 19일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며 38선을 넘었다.(사진) 이어 4월 21일 김규식도 38선을 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방북은 성과 없이 끝났고, 남북에 각자 정부가 수립되면서 결국 38선은 남북을 가르는 실제적 분단선이 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38선을 더 단단한 군사경계인 군사분계선(MDL)으로 바꾸어 놓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역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졌다. 휴전협정의 당사자(미국, 중국, 북한)들은 한반도 서쪽 끝 한강어귀 교동도에서 동쪽 끝 고성 명호리 해변까지 248㎞에 이르는 구간에 철조망을 치고 군사분계선이라는 팻말 1292개를 박았다. 노란색 철판에 검은 글씨로 ‘군사분계선’이라고 한글과 영어, 한자로 쓰여진 이 팻말은 숲에 잠기고 녹슬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판문점 외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옆에 서 있는 이 팻말을 볼 수 있다.

이 군사분계선 팻말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2㎞ 구간에 비무장지대(DMZ)를 조성했다. DMZ는 일부 민정경찰만 수색·매복할 뿐 사람의 왕래가 없는 상태로 수십 년간 이어졌다. 일부 환경단체 등은 이곳을 ‘세계적인 생태공원’ 운운하지만 실태를 모르는 얘기다. 남북 경계초소가 빽빽이 들어선 비무장지대는 생태계가 살아 있는 울창한 산림지역이 아니다. 이곳은 경계상 편의, 즉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불을 지른다. 이곳을 경계하는 군인은 “북한이 주기적으로 불을 놓으면, 우리도 불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맞불을 놓는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비무장지대는 생태계는커녕 풀과 잡목, 지뢰만 무성한 ‘불모지’이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와 아들 김신(오르쪽), 비서 선우진(왼쪽)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38선을 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전쟁 이후 철조망 쳐진 군사분계선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통로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 아니라 유엔군사령부 관할이다. 한국 기자들이 이곳을 취재하려면 유엔군사령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휴전협정 제7조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함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라는 책을 쓴 평화운동가 이시우는 “1975년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사가 해체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한반도에만 유엔사가 존재하고 있다”면서 “유엔군사령관은 용산 미군기지에 있는 한미연합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 등 3개 직책을 동시에 맡고 있는 미군 4성 장군”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전시 군사작전통제권도 바로 이 한미연합사령관 즉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허리를 자르는 군사분계선은 타의에 의해 획정된 70년 비운의 한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휴전협정 이후 1970년대까지 이 비운의 군사분계선을 넘은 사람은 간첩을 제외하고 없었을 것이다. 이때 남북관계는 ‘대화 없는 대결시대’였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이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철조망을 더욱 높이고 첨단무기를 배치하는 등 군비 경쟁에 열을 올렸다. 그 결과 한반도의 군사분계선 주변에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이 집결되기에 이르렀다. 통일부는 “비무장지대는 한반도 전체 면적(약 22만㎢)의 0.4%에 불과하지만 100만개 이상의 지뢰가 매설돼 있고 남북 군 사력의 70%가 배치돼 있다”면서 “‘군사적 완충지대’라는 취지와 정반대로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군사지역”이라고 설명했다.

휴전협정 이후 남북의 양해 하에 군사분계선을 넘은 최초의 고위급 인사는 1970년 5월 2일 비밀리에 이곳을 넘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다. 이후 남북적십자회담(1971년 8월 20일~1973년 7월 11일)과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973.12.5~1975.3.14)로 군사분계선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는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으로 공식 호칭하고 경제·적십자·국회회담 등을 열며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권도 총리가 참석하는 고위급 회담 끝에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는 1970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 내정불간섭, 비방 중지, 상대방 파괴·전복 금지 등을 담고 있어 매우 의미가 크다. 엄밀히 따지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인권법이나 대북 삐라 살포 행위는 이 합의서 위반이다.

김영삼 정부도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우선할 수 없다”면서 북한이 끈질기게 요구한 미전향 장기수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이런 가운데 적지 않은 민간인이 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1989년 8월 15일 당시 방북했던 대학생 임수경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는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으로 왔고, 1998년 6월 16일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관을 연출했다.

남북정상회담은 2002년 6월 15일 김대중-김정일 회담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비행기편으로 서해 영공으로 나가 북한 영공을 통해 입국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은 최초의 국가원수이다.

 

 

 

판문점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왼쪽에 낡은 군사분계선 팻말이 세워져 있다.

 

 

 

 


38선 이후 최초 남북을 잇는 4차선 도로
2002년 남북 정상의 6·15 선언은 개성공단을 낳는 씨앗이 됐다. 2003년 6월 착공된 개성공단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된 민족 공동 번영의 역사적 작품이다. 2014년 5개월 정도 가동이 중단된 적이 있지만 지금까지 훌륭히 가동되고 있다. 개성공단 측은 “2014년 12월 기준 5만4000여명의 북측 근로자가 일하고 있고, 누계 생산액이 26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통쾌한 것은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남측의 도라산역에서 북한 개성공단으로 4차선 도로를 시원스럽게 뚫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 다르게 그어진 38선(군사분계선)을 ‘거부’한 최초의 새로운 통로다. 사실 이 도로에는 차단막도, 군사분계선 표지도 없다. 그래서 어디가 남북의 진정한 경계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단지 문산변전소에서 개성공단에 공급하는 전기 송전탑 색깔이 남쪽에는 하늘색, 북쪽엔 검은색이 칠해져 있는 것으로 구분할 뿐이다.

이곳 경계를 맡고 있는 군인에 따르면 “우리 측 차량이 북으로 갈 때는 한국군의 에스코트를 받아 검은색 송전탑까지 간 뒤 여기서 기다리던 북한 측 호위차의 호위로 개성공단으로 이동한다”면서 “하루 23회, 대략 700대의 차량과 1000여명의 인원이 남북을 오고간다”고 설명했다.
 

이 길은 지금 유엔사가 아닌 남북이 자주적으로 관리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유엔사는 2003년 군사정전위원회가 직접 관할하는 판문점 말고, 도라산역~개성공단 통로와 금강산을 가는 동해선 출입관리를 한국 측에 위임했다. 하지만 유엔사는 관리권만 이양했지 관할권은 계속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미국과 논란이 됐다고 한다. 결국 노 대통령은 ‘형식상’ 유엔사의 허가를 얻고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지금도 남에서 개성공단을 오가는 기업체 차량은 형식적으로나마 유엔사 허가를 얻게 돼 있다.

하지만 이 길을 통해 개성공단을 오가는 차량들은 매우 평온해 보인다. 지금 한반도 허리에는 미국과 소련이 임의로 그은 38선이나, 휴전협정상 군사분계선이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부 장관으로 개성공단을 만들었던 정동영 전 의원은 “개성공단은 10년 후 통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그걸 쭉 따라가면 된다”면서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눈앞에 길이 나 있다”고 말했다. 남북 철도도 이미 연결됐다. 길은 열려 있는데 단지 열차만 오가지 않을 뿐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