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에 해당되는 글 19건

  1. [광복 70년 역사르포](19)원주 원동성당-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유신 항거 ‘행동하는 신앙’ 태동하다
  2. [광복 70년 역사르포](18)유신체제의 종언-궁정동 안가… 영구집권 야욕 쓰러뜨린 ‘총성’
  3. [광복 70년 역사르포](17) 유신체제-장충체육관… 정통성 없는 정권의 코미디 ‘체육관 선거’
  4.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6) 광주대단지 사건-옛 성남출장소… 정부수립 후 최초 도시빈민 투쟁
  5.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5) 전태일 분신 평화시장… 한국 노동운동의 순교자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다
  6. [광복 70년 역사르포](14) 경부고속도로-추풍령…건설근로자 순직 위령탑 조근근대화 ‘날림의 유산’
  7. [광복 70주년 역사르포](13) 장기집권 서막-국회 제3별관… 시의원 명단보다 더 중요한 ‘날치기 교훈’
  8. [광복 70년 역사르포](12) 베트남 파병 출정식 열린 동대문운동장…공과 따지기 어려운 ‘참전의 양면성’
  9. [광복 70년 역사르포](11) 6·3 사태 발원지-옛 서울대 문리대 교정(마로니에 공원)…민족·민주를 위한 갈망 푸르게 물들이다
  10. [광복 70년 역사르포](10) 남산 중앙정보부…무소불위의 공작과 고문의 흔적

지난해 <강원일보>가 창간 69주년을 맞아 강원도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무려 5.8%포인트 높았다. 또 ‘스스로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보수(37.7%)라는 응답이 가장 많고 중도(29.7%), 진보(21.9%) 순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국 조사 결과(중도 37.8%, 보수 29.7%, 진보 16.7%)와 비교해 강원도민의 정치성향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강원일보 2014년 10월 24일)

강원도 원주시는 도시라서 그나마 보수색채가 옅지만 이곳 국회의원 두 사람 모두 보수여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원주 역시 보수적 정치성향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원주는 1970년대, 특히 유신시대를 통해 가장 야성이 강한 도시, 민주화를 열망한 저항의 도시였다. 1960년대 4·19 학생혁명 국면에서 마산·부산이 민주화의 발원지로, 1980년대 이후 전남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평가된다면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의 성지는 강원도 원주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명동성당보다 오래된 근대문화유산
원주가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발원지는 바로 원동성당이다. 시골도시의 조그만 원동성당은 민주화 역사에서 서울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거대한 씨를 뿌렸다. 사실 원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보다 2년 앞선 1896년에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됐으나 복원돼 현재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제139호)으로 등록돼 있다.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이곳 원동성당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 발표한 ‘전국 가톨릭 교우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는 “물가고, 세금고, 저곡가, 저임금, 중소기업의 대량도산, 대량실업 등 모든 경제파국 현상도 바로 그 원인이 부정부패에 있다”면서 “사랑인 그리스도교적 사회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패배주의, 투항주의, 굴종의 감상적 신앙생활을 박차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사회정의를 위해 일어납시다, 싸웁시다”라고 주장했다.(원동교회 100년사, 1998년)

 

 

원주 원동성당은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종탑이 돔형이고 폭에 비해 길이가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위는 연좌 성토대회, 가두시위, 철야기도회 등 3일간이나 계속됐다. 이는 한국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순순히 따랐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를 비판할 정도로 체제 순응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반공을 앞세웠으며 현실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지 주교와 함께 일했던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이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회가 끝나고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지 주교가 취임했다”면서 “지 주교는 바디칸 공회가 요청하는 현대화된 교구를 만들기 위해 교구 원로와 신자들과 교회 개혁에 나섰다”고 말했다. 지 주교는 현실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회 정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권의 보복은 시작됐다. 1972년 10월 26일 지학순 주교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다 계엄사령부에 연행됐다. 지 주교는 곧 풀려났지만 ‘유신’으로 무장한 정권의 보복은 집요했다. 결국 1974년 7월 6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중정)에 연행됐다.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원동성당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특별기도회가 열렸다. 7월 1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주교회의가 열려 “정의의 실천은 주교의 의무”라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하고 전국 교회에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를 호소했다.

 

1975년 2월 지학순 주교가 석방된 후 시인 김지하와 함께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실모순 고발 시위 나선 지학순 주교
7월 16일 정권은 지 주교를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은 지 주교는 김수한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양심선언에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 주교는 당일 다시 연행됐고,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들이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의 투쟁은 한국 가톨릭의 전환점이 됐다. 7월 25일 주교회의에서 주교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프랑스 대사가 참석한 시국 미사가 열렸다. 하지만 지 주교는 8월 12일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이 모였다. 밤을 새는 열띤 토론 끝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사제단의 이름으로 신도 1500명이 참석한 첫 기도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를 기억하는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가두시위는 워낙 삼엄한 경찰의 제지로 도심으로 가지도 못하고 300m 앞 인동사거리 정도에서 멈췄다”고 말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정면으로 맞선 원동성당은 지금 조용한 시골도시의 성당으로 돌아와 있다.

 


이것이 사실상 정의구현사제단의 첫 탄생이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식 탄생은 이틀 후인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제1시국선언 발표부터로 삼고 있다. 제1시국선언문 핵심 내용은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인사 즉각 석방’, ‘국민 생존권 보장과 언론·보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대중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정책 확립’ 등이다.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한 이들은 신부, 신도 등 2000여명과 함께 십자가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1월 6일 제2시국선언, 11월 20일 사회정의실천선언 등으로 이어졌다.

지 주교는 226일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됐다. 그의 원주 귀향을 맞기 위해 3만명의 원주시민이 원주역 앞에서 기다렸다. 당시 원주시 인구가 10만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대단한 환영인파였던 것이다. 지 주교가 원동성당에 도착할 때 한 청년이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까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습과 비슷했다고 한다.

강원 원주가 1970년대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된 것은 지 주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지만 지역 출신 장일순의 역할도 컸다. 서울대 미학과에 다니다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장일순은 고향에 내려와 원주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했다. 장일순은 평소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 5·16 직후 3년간 투옥되기도 한 진보적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 원동교회 신도로 지학순 주교와 만난 것이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과 신도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미사를 드리는 모습. / 원동성당 100년사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에서 중요한 역할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1965년 지 주교가 이곳에 와서 신도였던 장일순 선생을 만나 교회개혁과 부정부패 추방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을 추진했다”면서 “지 주교 구속의 빌미가 된 민청학련사건 시인 김지하가 바로 장일순의 학교 제자였다”고 말했다. 결국 1970년대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시인 김지하로 이어지는 인맥이 원주를 반유신의 구심점으로 만든 것이다. 이즈음 지역 국회의원도 신민당 박영록 의원이 계속 당선될 만큼 원주는 야성의 도시였다. 1980년 광주 참상을 고발하고 쫓기던 김현장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이 원주에 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원주의 반유신 정서 때문에 가능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후에도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하다가 1993년 지병으로 선종했고, 장일순 선생은 1980년대에는 한살림운동과 생명사상운동을 펼치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문서화된 규약이 없다. 단지 ‘하느님과 정의를 위해 투신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사제단에 참여할 수 있다.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 무수히 많은 일을 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을 빼놓고는 기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정의구현사제단 홈페이지에 기술된 단체 소개에 그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희는 창립 후 지금까지 모순된 현실 안에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양심이 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하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횃불로서의 역할을 받아 안으며 많은 사제들이 3·1 민주구국선언, 5·18 광주 민주항쟁 등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제하의 성명서 발표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70~80년대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80년대 말부터는 통일운동으로, 90년대 들어서는 교회쇄신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오만과 독선 이명박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선언 발표(2010년 5월), 박근혜 정부에서는 불법 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2014년 2월)·쌍용자동차 희생자를 위한 225일간의 기도(2014년 2월)·통합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폭거라는 선언 발표(2014년 12월)·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2015년 5월) 등 주요한 사건과 고비마다 ‘용기 있는 소금’ 역할을 했다.

‘길 위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해 온 정의구현사제단은 “앞으로도 저희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과 인권,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권력자는 치욕의 역사를 숨기고 싶어한다. 자신 혹은 선대의 치부를 숨김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다. 기억에서 잊혀진다고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권력자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에 있는 ‘대청황제공덕비’가 아닐까. 이른바 ‘삼전도비’라고 알려진 이 비석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결국 청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은 ‘치욕의 상징’이었다. 이 비석은 우리 민족이 왜적과 오랑캐에 처음 패배한 굴욕의 증거였다. 청일전쟁 이후 청조가 힘이 빠지자 고종은 이 비석을 한강물에 내버렸다. 그런데 일제시대 가뭄으로 한강물이 마르자 이 비석이 다시 드러냈다. 해방후 이승만은 이 비석을 아예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런데 1963년 홍수로 다시 비석이 드러났다. 이 비석은 공터에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도로가 나면서 다시 철거해야 했다. 결국 송파구는 2010년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심의를 거쳐’ 복원했다. 이 비석이 원래 세워진 장소는 지금은 물이 찬 석촌호수 안이라고 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삼전도비만큼이나 치욕적인 사건이 바로 1979년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이다. 이 사건은 경위야 어떻든 우리 현대사를 넘어 근·중세사까지 올려봐도 매우 이례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였을까. 사건 발생 후 신군부는 그 역사적 현장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안전가옥) ‘나동’을 헐어버렸다. 2층 양옥으로 잘 지어진 이 건물은 워낙 비밀스런 존재였기 때문에 사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멀리 청와대 영빈관 옆에 있는 궁정동 안가는 모두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것이 바로 앞 청와대 경호실장 관저이다.

 

 


신군부 집권 후 궁정동 안가 ‘나동’ 철거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청와대는 안가를 모두 헐어내고 공원(무궁화동산)으로 만들었다. 비록 10·26의 현장은 이미 지웠지만, 나머지 안가마저 기억하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공원 앞 표석에는 “안가(안전가옥)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만 돼 있다. 안전가옥이 무엇이며, 이 안가에서 과연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공원에는 이곳에 우물이 있어 궁정동이라는 유래를 따 한자 우물정자의 조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이 있는 곳이 안가 나동의 연회장이 있던,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물정자 모양의 화강암을 두르고 안의 검은색 돌에는 태극문양을 새겨넣은 것이 그런 추측을 더한다. 하지만 이 조형물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이곳 궁정동 일대에는 중앙정보부장 집무실을 포함해 안가 5채가 있었다. 부장 집무실 바로 동쪽 옆에 ‘구관’, 골목 건너 북쪽으로 ‘신관’이 있었다. 그 신관 남쪽의 2층 양옥집이 ‘나동’, 나동 남쪽에 한옥으로 새로 지은 ‘다동’이 있었다. 이 모두는 중정부장 집무실을 통해 연결돼 있었고, 1979년 10월 26일 문제의 사건은 바로 ‘나동’에서 일어났다.

박정희 시대 중정 안전가옥은 모두 12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궁정동에 6채. 청운동에 3채. 삼청동에 3채. 구기동과 한남동에도 있었다. 이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거나 일부는 기관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관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경비하던 청와대 경호원들은 “사진촬영을 허용할 수 없다”고 제지한다.

당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72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유신체제는 시작됐다. 당시 신병치료차 일본에 있던 김대중(DJ)은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노리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라며 비난했다. 1973년 유신체제의 중정은 DJ를 납치해 살해하려 시도했다.

유신체제는 조용히 1년을 넘기지 못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11월 29일에는 한국기자협회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23일 함석헌·장준하·천관우 등 각계 인사들이 서울 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촉하면서 재야가 결집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는 이에 긴급조치로 맞섰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그 자체만으로 영장 없이 군법회의에 처단한다는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1호에서 시작해 무려 9호까지 발동됐다. 이 긴급조치로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해 대학생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기자와 문인을 구속해 펜을 꺾어버렸다. 강신옥, 이병린 등 인권변호사마저 줄줄이 구속했다. 노기남 신부 등 종교인마저 예외일 수 없었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이때 만들어졌다. 1975년 8월 15일에는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시인 양성우는 이 시기를 ‘겨울공화국’으로 표현했다.

 

 

10·26사건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 ‘나동’ 모습(사진 왼쪽)과 1979년 11월 9일 김재규가

현장검증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모습.(사진 오른쪽)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신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는 외부에서도 가세했다. 1976년 10월 15일 <워싱턴 포스트> 1면 머리기사에는 ‘한국정부가 박동선을 통해 미 의원 20명 이상에게 50만~100만 달러의 뇌물을 뿌렸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의 시작이었다. 1977년 6월 5일

<뉴욕타임스>는 박동선이 중정에서 고용한 인물이라고 폭로했다. 여기에 6년 반이나 중정부장을 맡았던 김형욱이 은밀히 미국으로 망명해 유신체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12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신직수 중정부장을 경질하고 새로 김재규 부장을 임명했다. 김재규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김재규는 김형욱 귀국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제3국의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다. 1979년 10월 8일 당시 언론은 부인 인터뷰를 통해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돼 파리경시청이 직접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경향신문 10월 17일) 그동안 숱한 의문과 억측을 불러왔던 김형욱 실종사건의 진실은 한참 후 밝혀졌다. 김형욱은 중정요원과 중정이 고용한 제3국 살인청부업자에 의해 프랑스 파리의 한 교외에서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밝혀졌다.(국정원 과거사위,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9년)

 

 

우물정자 조형물이 있는 이곳이 바로 안가 ‘나동’ 연회장이 있던 장소로 추측된다.


1976년 5월 22일 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선명야당을 주창한 김영삼(YS)을 각목으로 내쫓고 이철승 체제로 바뀌었다.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이라는 어용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YS는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1978년 12월 12일 치러진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집권 공화당보다 1.1% 많은 득표율을 올렸다. 야당에 대한 공작이 시작됐다. “야당 총재 김영삼이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민주회복, 양심수 석방, 헌법특위 설치, 사법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YS ‘생포작전’은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라는 소송으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법은 공작의 도구가 되고, 정책 판단에는 광기마저 엿보였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012)

9월 1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정당 당수를 주식회사 사장과 동일시해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YS의 총재직을 박탈했다. YS는 9월 15일 미국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 카터 정부는 독재자 박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이를 ‘사대주의 언동’이라며 10월 4일 YS를 국회의원에서 제명, 의원직마저 박탈했다. YS 제명은 그의 지역구인 부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10월 16일부터 부산대·영남대 학생들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18일 새벽 0시, 부산 일원에 계엄이 선포되고, 시위가 마산으로 확산되자 10월 20일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됐다.

청와대와 남산, 궁정동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중정부장 김재규는 부산과 마산을 직접 답사한 후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김재규는 “부마사태가 시민의 호응이 높은 민중봉기이므로 근본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자 각하는 화를 내시면서 ‘내가 직접 발포 명령하지, 나를 두고 사형이야 시키겠나’라고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병자호란 때 명분 주장하던 김상헌 생가터
하지만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이 보고한 ‘김영삼의 사주를 받은 시위’라고 판단했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영삼이 선동해 그렇게 된 것(부마사태)이다. 대통령은 철두철미하게 그렇게 생각했다”면서 궁정동 사태의 발단은 “차지철은 ‘그렇다’는 입장이고, 김재규는 ‘아니다’라는 것이 근본적 문제였다”고 증언했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10.4.4)

10월 26일 저녁 7시40분 궁정동 안가 다동 연회장.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가수 심수봉이 노래하는 가운데 김재규는 “이 버러지 같은…”이라면서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해 권총을 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향해’ 또 한 발을 발사했다. 이렇게 ‘유신시대’는 끝났다. 10·26이 정권 찬탈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란은 조금 더 역사의 평결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어떻게 그토록 완고하던 체제가 총 한 발로 무너질 수 있었을까. 박정희 연구가 전인권은 “유신체제는… 박정희 개인의 의지와 소수의 최측근 인사들의 권력욕이 빚어낸 체제였다. …이 체제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체제였다”고 평가했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2006)

앞서 병자호란 때 명분을 강조하며 항복을 거부하던 인물이 김상헌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김상헌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 자리다. 지금도 이곳에는 ‘김상헌 생가터’ 표석과 시비가 있다. 조선이 청에 굴복하고 김상헌은 중국 심양으로 압송됐다. 1640년 압송 도중 읊은 것이 유명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난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이다.

김상헌의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대목은 1979년 10·26 이후 안개정국과 올듯말듯한 민주화와 교묘히 겹쳐진다. 결국 10·26 이후 고국산천은 광주의 피를 먹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김재규는 유신의 머리를 자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머리 잘린 유신이란 괴물에게 새로운 머리가 솟아났다.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 전두환이었다”고 평가했다.(한홍구, 유신, 2012)

375년 전 김상헌이 지은 시조는 ‘시절이 하수상한’ 2015년 6월 지금에도 ‘알듯 모를 듯한’ 무엇인가를 시사하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갑작스런 대통령 특별선언이 예고됐다. 국민들은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박정희 대통령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아들여…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라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 대통령 특별선언은 헌법을 중단하고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을 대신하는 비상조치를 취한다는 것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즉각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과 방송, 출판은 사전 검열이 시작됐다. 세종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진주해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았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시킬 권한이 없었는데 국회를 해산한 ‘헌법 파괴’가 자행된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헌정질서가 바뀌면서 제3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장기집권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노욕’에 의해 유린되고, 파괴되고, 결국 누더기가 됐다. 이승만은 재선을 하기 위해 발췌개헌을 했고, 3선을 하기 위해 2차 사사오입 개헌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을 가두고, 절차도 거치지 않고 기립표결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 결국 4·19 학생혁명으로 그 ‘노욕’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올해 1월 17일 알루미늄 패널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장충체육관은 체육문화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제4공화국 네 번의 대통령선거 치러
내각책임제가 도입돼 권력 분점시대가 잠깐 있는가 했지만 곧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리고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는 재선을 거치고 ‘노욕’에 가득차 3선을 넘었다. 하지만 노욕은 3선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종신 대통령, 영원한 권력을 추구한 것이 바로 유신이다. 유신체제는 한 절대권력자의 ‘영원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체제였다.

그 영원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간선제 선출방식이다. 유신체제에서 상징적 용어는 바로 ‘체육관 선거’라는 말이다. 유신체제에서 박정희가 두 번, 그리고 최규하·전두환 두 정권으로까지 이어진 ‘체육관 선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이 네 번의 체육관 선거는 제4공화국 대통령 선거 전부였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적신호가 켜졌다. 온갖 관권·금권선거를 동원했지만 국민들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꼈다. 당시 중앙정보부 선거전략 참모인 전재구는 4월 7일 이후락 부장에게 “각하의 업적은 모두 인정하는데 장기집권이 염증이에요, 감표 요인이 분명합니다. 지방 중정 분실장과 기관장, 말단공무원, 유지들이 한결같이 ‘마지막 출마’ 선언을 하길 희망합니다. 대통령 각하에게 꼭 건의해 주십시오”라고 보고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012)

 

1972년 12월 16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박정희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다가 결국 투표 막바지인 4월 25일 서울 장충단 유세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이며 후계자를 기르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94만여표 차) 승리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선거유세 때 했던 ‘마지막 출마’ 약속을 휴지처럼 내버렸다. 그리고 편법을 통한 장기집권 구상,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계획했다. 그것이 1972년 5월 중앙정보부장 안가가 있는 궁정동 밀실에서 시작된 이른바 ‘풍년사업’이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 정보부장, 청와대 홍성철·김성진 비서관, 신직수 법무장관과 헌법학자 한태연과 갈봉근 등이 그들이다. 8월 개헌 기본 구상이 완료되자 본격적인 헌법 조문작업이 시작됐다. 그때 김기춘 검사(최근 청와대 비서실장 역임)가 조문작업에 참여했다.

투표율 100%에 득표율 99.9%
드디어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풍년사업이 공개되고, 열흘 후인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유신헌법’이라는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내놓았다. 유신헌법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의 찬성으로 확정됐다. 체육관 선거의 유신헌법은 이렇게 삼엄한 계엄하에서 만들어졌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직선제에서 지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다.

12월 23일 전국에서 뽑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한 명도 빠짐 없이 장충체육관에 모였다. 이 체육관 선거에서 단독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99.9%의 득표율(2357표 득표, 무효 2표)로 당선됐다. 장충체육관과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으로 통하는 통로에 ‘장충체육관 역사전시관’이 있다. 여기에는 8대 대통령선거 과정을 ‘대통령 선출을 위한 투표는 오전 11시55분경 전 대의원의 투표가 끝나고 12시부터 개표에 들어가 오후 12시35분에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0월 17일 세종로 국회의사당 정문을 계엄군의 탱크가 막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신체제의 특징은 대통령을 입법·사법·행정 3권 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정회라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었다. 법관 추천제도를 폐지하고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했다.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 권한도 헌법위원회로 넘겨 사법부가 무력화됐다. 지방자치제도는 폐지됐고, 노동3권은 제약됐다. 이에 비해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나고 연임제한도 없앴을 뿐 아니라 헌법을 능가하는 긴급조치 발동권까지 부여했다.

유신체제는 3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은커녕 오직 단 한 사람의 영구집권만 가능케 한 체제였다. 역사학자인 최상천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유신체제는 일본의 천황처럼 한 개인이 국가 위에 올라타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최상천, 박근혜 바로보기, 2012)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이 또 장충체육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2577표(무효 1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다시 당선, 제9대 대통령이 됐다. 단일후보에 99.9%의 득표율이었다. 당시 문교부에서 발행한 중학생 교과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입후보자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문교부, 승공통일의 길2) 이 대목을 빗대 대한민국 투표가 북한을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여럿 생겼다.

최상천 교수는 유신체제를 북한 김일성과 함께 가는 ‘적과의 동침’이라고 해석했다. 최상천은 “이 역사적 동침으로 둘은 쌍둥이를 낳았다. 그 이름은 유신과 유일이다. 박정희는 남에서 유신체제를 선언하고, 김일성은 북에서 유일체제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 최상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그렇게 볼 소지가 충분했다”고 평가했다.(강준만, 현대사 산책, 1970년대 1)

장충체육관에서 동국대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마련된 장충체육관 역사관은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레슬링과 복싱의 추억, 올해 재탄생
하지만 유신체제는 강력한 국민적 저항을 맞는다. 유신체제는 국민적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초헌법적 수단이 동원됐다. 유신체제를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까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해 군법회의에서 처단했다. 결국 유신체제의 모순은 유신체제를 만든 내부로부터 터졌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절대권력의 심장에 쏜 총으로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문제의 체육관 선거는 이후 몇 번 더 치러졌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1979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8개월 만에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전두환 역시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이 제5공화국 헌법을 새로 만들면서 체육관 선거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장충체육관은 1960년 원래 육군체육관에 직경 80m의 대형 철골 돔을 씌워 국내 최초의 실내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다.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 끝에 1963년 2월 준공한 장충체육관에 대해 당시 언론은 사설을 통해 “농구, 권투, 탁구, 배구 등을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특징뿐만 아니라, 난방 및 냉방시설을 갖추고 있어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동아일보 1963년 2월 1일)
 
장충체육관은 60~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실내스포츠의 메카로 군림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참피언 김기수를 탄생시켰고, 1967년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 열풍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장충체육관은 실내스포츠로 국민에게 기여했지만, 선거를 통한 정치적 이미지는 낙제점이다.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체육관 선거는 곧 정통성을 상실한 권력’이라는 등식으로 자리잡았다.

낡고 비좁았던 장충체육관은 2010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1월 17일 체육문화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고슴도치 같던 외형은 알루미늄 패널을 입혀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일부 체육대회와 문화행사가 열렸지만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모든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근접성과 최신 음향 및 조명시설을 갖추고 있어 스포츠는 물론 공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인구 100만명에 육박하는 경기도 성남시는 분당으로 알려진 신도시가 중심이지만, 과거에는 수정로 숫골사거리가 도심이었다. 아래층에 이마트 성남점, 위에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신세계 쉐던주상복합 자리가 바로 옛 성남시청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1964년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출장소가 들어선 이후 성남시청이 여수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지역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일대에 있는 성남 시민회관, 시립 도서관, 방송국 등이 이곳이 과거 도시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성남은 분당신도시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신도시로 계획된 도시다. 하지만 이곳 지형을 가만히 살펴보면 좀 이상하다. 과거 성남시청 자리에 들어선 신세계 쉐던주상복합은 가파른 언덕 중간에 들어서 있다. 바로 옆 블록은 연립주택 등이 가파른 언덕으로 이어져 있다. 이마트 앞쪽 신흥동 쪽도 역시 가파른 고개로 이어져 있다. 평평한 분지가 아닌, 구불구불한 언덕과 고개가 계속된 곳에 도시 중심이 들어선 것이다. 게다가 언덕 넘어 얼마 안 가서 바로 단대천이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현재 이 하천은 복개돼 있다).

비탈에 20평 단위로 규격화된 집이 빽빽히 들어서 있고, 골목도 대개 바둑판처럼 돼 있다는 점에서 이곳이 규격화된 신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문은 이렇게 꾸불꾸불한 언덕과 하천이 있는 곳에 어떻게 신도시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로 누적된 도시빈민 문제가 바로 이곳에서 폭발했다. 이곳은 1971년 8월 10일 이른바 ‘8·10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광주대단지 사건이란 경기도 광주시(현 성남시) 주민 5만여명이 시위에 가담, 무력으로 시청을 점령하고 방화한 사건을 말한다. 44년 전 성남시출장소 앞으로 돌아가 보자.

44년 전 광주대단지 사건 때 시위대에 의해 불탄 옛 경기도 성남시출장소 자리에는 지금 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주민 5만여명이 시위, 시청 점령
“10일 오전 9시부터 모이기 시작한 주민들은 11시께 1만여명이 광장과 출장소 주변 빈터, 길 등을 메웠다. 20대 청년 등 30여명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주민들의 가슴에는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 반대한다’는 리본이 달렸으며, 수십개의 플래카드를 든 군중은 오전 11시 양(택상 서울) 시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 폭우 속에서 양 시장을 기다리던 주민들은 ‘우리를 또 속였다’ ‘시장이 시간을 어겼다’며 흥분, 10여명이 시 사업소로 몰려가자 수십명이 뒤따랐다. 몰려가던 군중의 일부가 출장소 앞에 세워둔… 지프를 부수어 개울에 쳐넣었다. 11시40분 난동자들은 다시 성남시출장소로 몰려가… 책상을 부수고 서류를 불태워 본관 내부가 몽땅 타버렸다. 난동자들은 또 성남출장소… 반트럭을 불태워 개울에 처박았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차 2대도 접근을 못하고 되돌아 갔으며, 경찰도 병력이 적어 손을 쓸 수 없었다.…”(경향신문 1971.8.11)

8·10 광주대단지 사건의 원인부터 따져보자. 급속한 공업·산업·도시화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 말부터 거대한 도시빈민 주거지가 생겨났다. 이들은 서울의 청계천변과 창신동, 용두동, 봉천동 등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하면서 여러 도시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서울시는 이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킬 장소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350만평의 땅(광주대단지)을 마련했다. 그리고 1969년 9월 1일부터 20평의 땅을 분양해 이곳에 철거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신도시에 철거민을 이주시킬 계획이었으니 언덕이 많은 값싼 부지를 마련한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철거민이 이주할 당시 이곳은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공중화장실마저 변변하게 마련돼 있지 않았다. 철거민들은 대충 언덕배기에 천막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하지만 입주권 즉 딱지가 전매되고, 이 딱지를 얻기 위해 각지에서 단대천 주변에 천막을 치는 등 부동산 투기가 만연했다. 마침 19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개발붐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이 딱지를 사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렇게 성남시에 몰린 인구는 1971년에 14만~16만명까지 늘었다.

 

당시 성남시민들이 시영버스를 빼앗아 시위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시 철거민들 강제 집단 이주
그동안 수수방관하던 정부는 입주권 위조, 철거비리 등이 만연하자 7월 14일 입주권 전매를 금지시키고, 토지 분양가를 2배로 인상했다. 불하한 토지에 취득세까지 부과했다. 입주한 주민들은 분노했다. 게다가 정부는 이곳에 48개 공장을 입주시켜 자족도시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말뿐이었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공장 건설도 시들해져 버렸다. 몇몇 공장이 입주했지만 수십만명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다.

일거리를 찾지 못한 도시빈민들은 심각한 도시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대책위원장을 맡은 전성천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한 일의 중요한 부분은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치우는 일인데, 하루에 몇 구의 시체를 치우기도 했다고 한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재개발의 그늘-철거, 2002.3.24)

이런 가운데 정부는 전매한 땅에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를 무효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분양권 전매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철거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우선권이 무시되고, 외지인의 투기판이 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특히 일자리 등 약속했던 생계수단 마련 요구를 묵살한 것에 분노했다. 결국 8월 10일 성남출장소가 불에 타고 인근 파출소까지 파괴됐다.

광주대단지 사건 때 시위대에 의해 점령된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는 현재 수정경찰서로 규모가 커져 있다.

경찰서 넘어 태평고개는 당시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던 곳이다.

 

 


“낮 12시10분께 난동자 30여명이 성남지서에 몰려가 몽둥이로 유리창을 부순 후 지서 안에 있던 경찰차를 길로 끌어내 불태웠다. 오후 1시께 10대, 20대 청소년 50여명이 시영버스를 뺏어 타고 지붕에 올라가 탄리천길을 달려 ‘서울로 가자’며 수진리고개를 넘으려다 되돌아와 거리를 돌았다… 오후 3시반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난동자들을 길에서 언덕 위로 몰자 500여명으로 줄어든 난동자들은 언덕 위에서 돌을 던지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5시반까지 대치했다.…”(경향신문 1971.8.11)

정부가 주민들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이 소요사태는 6시간 만에 끝났다. 간간이 주민들의 시위가 이어졌지만 12일 완전히 평정을 되찾았다. 당시 김종필 총리는 “행정부에 전적으로 잘못이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면서 “주민에게 한 약속은 모두 이행토록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과 주민 100여명이 부상했고, 주민 22명이 구속됐다.

‘선입주 후개발’ 무리한 정책 드러나
이 광주대단지 사건은 정부 수립 이후 최초, 당시로서는 최대의 소요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난동’ ‘폭동’ 으로, 정부와 재판부는 ‘광주대단지 집단난동사건’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봉기’, ‘항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재야에서는 정부가 신속히 사과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도시빈민의 승리’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 당시 서울대 법대생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제 민중은 과거의 체념과 좌절을 딛고 민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평가했다.(송건호전집 1, 한길사, 2002)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을 놓고 지금도 치열하게 학문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 8월 ‘8·10 광주대단지 사건’ 40주년을 맞아 성남지역 언론사대표자협의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 사건이 한국의 도시정책, 빈민운동, 지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면서 “그것은 2009년 1월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지난 40여년 동안 무허가 정착지의 철거·정비과정, 무분별한 도시 재개발정책 시행에 맞서 주거와 생활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도시주민들이 ‘저항의 첫 포문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이 사건을 ‘8·10 광주대단지 항거’라고 표현했다.

 

언덕에 20평 주택이 빽빽히 들어선 형태의 성남 구도심은

과거 정부의 무능한 신도시 정책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임미리 박사는 이 사건의 투쟁 주체와 결과를 중심으로 이를 재평가한다. 임 박사는 “정권의 즉각적인 항복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붙여진 ‘성공’이라는 평가는 재평가돼야 한다”면서 “전매입주자 중에는 결코 도시하층민으로 분류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광주대단지 사건을 처음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은 도시빈민이 아니라, 부동산 전매업자였고, 정부의 혜택 역시 이들 전매업자에게 맞춰져 있을 뿐 도시빈민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기억과 전망, 여름호, 2012)

실제 정부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투기꾼인 전매자들의 토지불하 가격 인하 요구만 수용됐을 뿐, 판자촌 세입자나 초기 철거민에 대한 일자리 등 생계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김동춘 교수도 “빈민 주거문제는 빈민 생활문제와 결부되어 있는데 후자 대책이 없는 ‘선입주 후개발’의 논리에 입각한 무리한 대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이런 지적에 공감했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해 학술적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이 사건은 도시빈민, 철거민, 도시 재개발, 부동산 투기 등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사건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의 무능함 역시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문제는 지금도 그러한 정부의 무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성남 구도심은 많이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언덕과 고개, 좁은 골목에 20평으로 구획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시구조는 아직 그대로이다. 정부의 무능과 투기꾼이 만들어놓은 ‘괴물 신도시’의 잔재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역사에서 기원전과 기원후를 구분을 하는 A.D.와 B.C.는 ‘예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의미한다. 예수 탄생을 기점으로 세계 역사가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요즘 안전과 관련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표현으로 ‘세월호 이전과 이후’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시대구분을 할 만한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전태일 분신사건 이전과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70년 평화시장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제출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평화시장 사업주 대표들과 노동시간,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삼동회 회원들은 11월 13일 있으나 마나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날 평화시장 주변에는 사업주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평화시장을 에워쌌다. 시위대는 몇 번 구호를 외쳤지만 이내 플래카드를 경찰에 빼앗겼다. 결국 시위는 흐지부지 끝나는가 싶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오후 1시30분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휘발유를 뿌린 그의 몸에 라이터가 켜지더니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전태일은 불타는 몸으로 몇 걸음 뛰어나가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때 누군가가 근로기준법 책자를 불타는 전태일의 몸을 향해 던졌다. 근로기준법 화형식은 그렇게 이뤄졌다. 전태일은 그날 오후 10시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2005년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전태일 동상은 일어서려는 모습으로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전태일과 함께 불타버린 근로기준법
전태일 분신사건은 내외에 큰 충격을 줬다. 서울대 법대생은 전태일 유해를 인수해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나섰고, 상대 학생 400여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전국 대학가에서는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다. 이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탄생했고, 이후 1970년대에만 2500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전태일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됐다. 전태일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지 10년째, 무리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노동자들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전태일 개인의 사건이기에 앞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순이 응집되어 폭발한 하나의 민중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안병무-시대와 민중의 증언자)

전태일 장례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모친 이소선 여사.

이 사진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봉제업자 전상수와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업에 망하자 가족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전태일은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종로 파고다공원 인근에서 구두닦이, 신문팔이, 동대문시장에서 리어카 뒤밀이를 하며 생활했다. 당시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뒤에서 밀어주면 30원을 받았다.

전태일은 1964년 봉제공장 미싱 보조로 평화시장에 발을 들인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지만 월급은 형편 없었다. 당시 이들의 근로조건은 다음과 같이 경향신문에 폭로됐다.(1970년 10월 7일)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m 정도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고… 이런 환경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 옷감에서 나온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노동청에서는 건강진단을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종업원 2~3명만 진단받게 한 후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

 

5월 29일 전태일 분신 4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알리는 포스터.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 기념동상
공장 친목회 모임은 노조 결성을 위한 결의체로 바뀌면서 전태일은 문제의 근본을 따져봤다. 그 결과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노동청과 청와대 등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수없이 진정하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육신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직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됐는데 사실상 유서였다. 이 편지는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라고 시작해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쉬러 간다네…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라고 적었다.

전태일 분신을 기리는 사업은 꾸준히 이어졌다. 1970년대에는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돼 전태일 추도식이 열렸다. 1980년대 전태일은 ‘노동운동가’로 재평가되고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1985년에는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재단이 만들어져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고, 그가 분신한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0년 전태일 분신 30주기를 맞아 평화시장 앞 보행로에 표석이 설치됐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분신 현장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난 후 청계천 버들다리 가운데에 전태일 기념동상을 세웠다. 국민 모금으로만 4억원가량이 모였다. 동상 앞 보도에는 성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글귀를 새긴 동판 4000여장이 설치됐다. 동판은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의 것도 있다. 노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라고 썼다. 상반신 동상은 동쪽을 보며 땅을 짚고 하늘을 향하는 모습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죽은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상을 세운 사례가 없다”며 동상 건립에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이를 밀어붙였다.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은 2014년 3월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다. 그렇게 죽은 지 35년 만에 전태일은 재평가됐고, 또 새롭게 태어났다. 많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그 어떤 민주화 열사보다 단연 앞선 것이다. 그만큼 전태일의 분신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리라.

전태일 분신 45년이 지난 평화시장 그 자리는 여전히 번화하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274번지 평화시장 A·B동 사이가 바로 분신의 현장이다. 평화시장은 도매시장으로 주로 야간에 성시를 이루지만, 주변은 낮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전태일이 리어카를 밀며 30원을 벌었던 이곳은 지금도 물건을 운반하는 노무자들로 붐빈다. 단지 운반수단이 리어카에서 오토바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미싱기를 돌리던 봉제공장은 모두 사라졌다. 봉제공장은 동남아로 떠나고 일부는 종로구 창신동 등으로 옮겨갔다. 남평화시장 김용민 관리사무소장은 “현재 이곳 남평화시장에만 도매상 700여개가 있고 과거 봉제공장은 한 곳도 없다”고 설명했다. 바로 옆에 있는 동평화시장 도매상가는 이곳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요즘 이 일대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패션과 디자인의 거리로 변모했다. 특히 동대문 일대는 한국을 찾는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로 넘쳐난다. 하지만 도매시장으로 밤에 주로 영업하는 평화시장과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동대문시장은 매출에서 온도 차이가 크다.

상인들은 평화시장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김용민 관리소장은 “중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동대문시장의 밀레오레나 두타 등에서 쇼핑하지 이곳 평화시장을 이용하지 않는다”면서 “국내 경기가 워낙 불황이어서 폐업까지는 아니지만 이점(점포를 옮기는 것)과 공점포(빈 점포)가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인들은 내수침체와 온라인 쇼핑몰로 인해 예전처럼 평화시장이 활기차지 않다고 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연말 전태일 분신 현장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미래유산이란 100년 후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보물’을 말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장소, 음악도 포함된다. 서울시는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로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신호탄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므로 보존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태일 분신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좌절은 이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양적 발전은 이뤄졌지만 질적 변화는 없다는 주장도 많다. 마침 5월 29일 참연구소(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부설 연구소)가 주최하고 전태일 재단이 후원하는 ‘전태일 열사 45주년 기념 특별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제는 ‘상징의 재해석; 2015년 전태일’이다.

이날 노동분야의 주제발표를 맡은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는 “전태일을 이해하는 흐름에는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라는 자유주의자들과 1980년대에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변혁을 요구한 ‘노동해방의 요구’가 있다”면서 “하지만 진정한 전태일의 생각과 주장은 이것을 뛰어넘는 ‘인간해방’이다”라고 설명했다. 전태일의 분신 아니 노동의 가치는 계속 재해석, 진화되는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물건은 무엇일까. 물론 국민이나 애국심 같은 무형의 재산은 제외하고 실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말이다. 민간·국가를 합해 장부가액으로 가장 비싼 것은 바로 경부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조8806억원이다.(2013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기준) 이는 대한민국 국유재산 총액 912조1000억원 중에서 단연 1위다. 건물로 가장 비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1·2단계를 모두 합해도 채 1조원이 안 된다는 점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재산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고속도로는 6조5618억원짜리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착공해 1970년 7월 준공돼 45년이나 된 낡고, 땜질투성이 도로이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비싼 재산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정 가운데 지점
철도도 마찬가지지만 경부고속도로 역시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여 빠른 1969년 4월 개통된 서울~인천 간 경인고속도로다. 경인고속도로는 23.4㎞에 불과해 경부고속도로 428㎞의 10분의 1도 안 되기 때문인지, 고속도로 하면 경부고속도로가 연상된다.

게다가 경부고속도로는 비단 금전적 가치뿐만 아니라, 산업의 대동맥이나 조국 근대화의 상징 등 온갖 수식어를 달고 60년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현대사 연구가 박태균 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는 경부고속도로를 ‘1960년대의 결정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에 있는 준공 기념탑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와 칭송이 가득하다.

 


경부고속도로 정 가운데 지점이 바로 추풍령이다. 전체 길이 428㎞의 중간인 214㎞에 위치한 추풍령 휴게소 하행선에 ‘서울·부산 중심점’ 탑이 서 있다.(현재 경부고속도로는 굽은 도로를 곧게 펴는 선형개량 공사로 총연장이 416㎞로 준공 당시보다 12㎞ 짧아졌다) 조그만 소공원으로 꾸며진 개통기념 표석 안내판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한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 1위’라고 설명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역시 한국 경제를 바꾼 위대한 순간은 선거라는 정치적 국면에서 나온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3선 개헌을 처음 언급한 공화당 윤치영 의장서리의 개헌 필요성 발언(1967년 12월 17일)과 이어진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정치적 논란이 많았다. 마치 이명박 대통령(MB)의 4대강 운하사업처럼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본격 시작했지만, 설계도면이나 자금동원 계획 등 구체적 계획은 하나도 확정하지 못했다. 정부는 세계은행(IBRD)에서 자금을 빌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 대가로 얻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고속도로 건설에 투입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근시안적인’ 야당이 건설현장에 드러눕는 등 방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상징조작이다. 당시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야당 당수 유진오는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추어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68.1.11)

 

추풍령 휴게소는 경부고속도로의 중앙으로 이곳에 조그만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야당이 반대한 이유는 자금지원을 요청받았던 IBRD와 같은 맥락이었다. IBRD가 자금지원을 거부한 이유는 “남·북 종단도로 건설보다 동·서 횡단도로 건설이 경제적으로 더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3선 개헌 반대투쟁에서 야당은 ‘하이웨이 전술’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 정치적 의도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 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 등의 기사가 있다.(경향신문 1969.10.7)

이후 1971년 대선에서 야당 김대중 후보조차 “우선은 지방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등 도로 건설은 선거 때마다 여야 단골 공약이 됐다. 아마 크던 작던 선거 때만 되면 도로 기공식이 벌어지는 ‘씁쓸한 전통’도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대전인터체인지에서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통식을 하고 있다.

 

 


높이 30.8m 준공 기념탑 우뚝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1968년 2월 1일 16개 건설업체가 일제히 공사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3개 군 공병단도 가세해 마치 전투 치르듯 공사가 이뤄졌다. 주요 공사는 현대건설이 맡았다.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MB)은 나중에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 정주영 회장은 민간 출신의 사령관이었다”고 회고했다.(이명박, 신화는 없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가장 난공사는 옥천 당재터널 공사였다.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현대건설 공영진 부사장은 “지층이 절암토사로 된 퇴적지층이라 공사 진척이 되지 않았다. 해결방법은 보통 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흑자를 포기하는 결단이 요구됐다. 결국 이 공사는 조강시멘트를 투입하면서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해 3개월 걸린다는 공사를 25일 만에 끝내 경부고속도로 개통 행사를 정시에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매일경제 1995.6.14)

드디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이 열렸다. 불과 3년 5개월 만에 428㎞ 길이 4차선 고속도로를 뚫은 것이다. 원래는 1971년 준공할 계획이었지만 이를 1년이나 앞당겼다. 총공사비는 429억7300만원으로 1㎞당 1억원에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추풍령휴게소 상행선 방향에 웅장한 30.8m 높이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서 있다. 서울대 미대 송영수 교수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형상으로 디자인한 것이다. 이 탑의 정면에는 낯익은 서체(박정희 서체)의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라는 휘호가 써 있다. 이 탑의 하단에는 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기본사항이 적혀 있다. 폭 22.4m(4차선) 도로로 100m 이상 교량이 29개소, 100m 이하 교량 281개소, 터널 상하 12개 4008m, 시멘트 663만2000대, 철근 4만8700톤, 연인원 890만명이 165만대의 장비를 동원해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탑의 뒷면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 “이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 각하의 역사적 영단과 직접 지휘 아래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에 있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조국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영광스런 자랑이다”라고 써 있다. ‘역사적 영단’ ‘직접 지휘’ 등 찬사와 칭송으로 가득하다.



 

준공 기념탑이 높은 곳에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에 77명의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멀리 떨어진 금강휴게소 한쪽 구석에 서 있다.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 남겨
시인 이은상이 지은 ‘고속도로의 노래’가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 알았다. 그 중 “꿈에도 내 소원 조국의 번영/달려라 자주의 길/달려라 부강의 길/천리를 주름 잡는 고속도로/…달려라 자유의 길/달려라 평화의 길/세기를 앞당기는 고속도로/…달려라 승리의 길/달려라 통일의 길/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라는 대목이 인상 깊다. 기념탑 정면에 있는 박 대통령의 ‘통일의 길’이라는 대목과 노랫말에 등장하는 ‘자주·부강·자유·평화·승리·통일’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의외다.

솔직히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성과 효용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부정적 유산도 많이 남겼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기념탑에 새겨진 세계 최단 기간 건설이라는 자랑은 ‘날림공사’ ‘부실공사’와 비슷한 말이다. 경부고속도로는 개통 1년 만에 전 구간을 다시 포장해 총건설비의 10%가 추가됐다. 건설비 절감을 위해 고속도로 안전에서 매우 중요한 중앙분리대를 설치하지 않은 채 개통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근원과도 연결된다.

무엇보다 부정적 유산은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과학자나 공학자들이 정치적으로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자와 공학자의 양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던 MB는 박정희 유산을 재연하려 했다. 4대강 운하가 바로 그것이었다. MB의 문제는 ‘댐’을 ‘보’라고 우기며 과학과 공학을 왜곡했다는 점이다. 그 토목 만능 정치 이데올로기에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동원됐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MB는 과학과 공학을 정치논리에 함몰시킨 커다란 ‘우’를 범했다.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한편에 조그만 위령탑이 있다.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다. 3년여라는 짧은 기간 ‘전투’ 같은 공사로 77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다. 도로공사는 매년 7월 7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연다고 한다. 이 위령탑은 그 순직자를 기리기 위한 탑으로 고속도로 준공과 함께 건립했다. 의문스러운 것은 기념탑과 위령탑을 왜 이렇게 각각의 장소에 건립했을까 하는 점이다. 찬양과 경축의 자리와 추모의 자리는 한곳에 있어선 안 된다는 발상이었을까. 기념탑이 추풍령 위에서 내려보듯 서 있다면 위령탑은 계곡 아래에서 자신이 만든 고속도로를 훔쳐보는 형국이다.


숨진 이들에게 주어진 ‘훈장’은 ‘산업전사’라는 호칭이었다. 이곳 위령탑에 시인 이은상은 이들을 ‘그들은 실로 조국근대화를 향한 민족행진의 산업전사’라고 헌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산업전사라는 훈장 하나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예 훈장도 없이 숨지는 해고노동자도 적지 않다.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28명의 노동자가 숨졌다. 경부고속도로 준공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9만명, 하루 251명의 노동자들이 재해를 당하고 있다.(2015년 1월 노동부 통계) 이젠 ‘산업전사’라는 이름 하나로 그들을 위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서울의 한복판, 시청앞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이 세종대로다. 옛날 주소로 서울시청에서 광화문 4거리(세종대로 4거리)까지가 태평로, 여기서 광화문까지가 세종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길이다. 왼쪽으로 덕수궁, 오른쪽 시청으로 시작해 프레스센터, 서울시의회 건물, 파이낸스빌딩, 신문사 2곳, 세종문화회관, 교보문고, 미국대사관, 세종로 정부청사가 좌우로 들어서 있다.

그 중 서울시의회 건물과 프레스센터 앞을 잇는 세종대로 21길에는 ‘범상치 않은’ 지하도가 하나 있다. 덕수궁 지하도라고 불리는 이 지하도 입구는 화강암 기단에 계단 손잡이는 굵은 황동으로 보통 지하도와 달리 매우 고풍스럽다. 게다가 지하에 있는 계단 중앙에는 용의 부조물이 새겨진, 고궁에서나 볼 수 있는 왕들이 밟고 지나가는 ‘답도’까지 만들어져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중앙정보부도 사용
이 지하도가 이렇게 고급스럽게 꾸며진 이유가 있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이 과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고, 세종대로 건너편인 지금의 파이낸스빌딩 자리에는 국회 별관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지하도는 국회 본관과 국회 별관으로 통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높으신 분들이 왕래하는 지하도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급스럽게 지은 것이다.

세종대로에서 광화문 쪽으로 왼편에 있는 서울시의회는 과거 국회 본관이, 오른쪽 파이낸스빌딩이 있던 곳이 제2·제3별관이 있던 자리다.

 


서울시의회 건물은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11호인 구 국회의사당 건물은 1935년 부민관으로 당시 경성부민(서울시민)을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부민관은 18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과 중강당 등이 있어 연극이나 영화, 강연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최첨단 음향과 냉난방 시설을 갖춰 지금으로 치면 세종문화회관이나 서초동 예술의전당쯤 된다. 건축학적으로도 모서리에 46.6m의 시계탑이 만들어져 당시로서는 위용과 간결함이 강조된 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꼽힌다.

이곳에서는 일제 강점기 황민화를 선동하는 예술과 정치집회가 자주 열렸다. 친일 인사들의 식민화 연설과 전장으로 가라는 선동도 이곳에서 많이 이뤄졌다. 그래서 1945년 7월 24일, 조문기, 유만수 등 대한애국청년단 단원들이 친일 행사에 폭탄을 터뜨린 부민관 폭탄의거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물 한쪽 구석에 이를 알리는 조그만 표석이 있다.

이 건물은 6·25전쟁 이후인 1954년 6월 9일부터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까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발췌개헌과 한일협정 비준, 3선 개헌, 국보위 특별법 제정 등 숱한 현대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원래 입구는 도로쪽 동쪽에 있었지만 1980년 태평로(세종대로) 확장으로 입구가 남쪽으로 바뀌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30분, 3선 개헌안을 2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킨 공화당 의원들이 황급하게 제3별관을 빠져 나오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관심거리는 이 지하도로 이어진 건너편 국회 별관이다. 이 지하도를 건너 지금의 파이낸스빌딩 자리에 국회의사당 제2별관과 제3별관이 나란히 있었다. 그 중 특히 제3별관에는 유독 가슴 아픈 역사가 많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단행되고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곳에 자리잡았다. 또 김종필(JP) 중앙정보부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정보기관, 즉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낸 첫 사무실이 이곳이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 중인 회고록에서 “5월 19일 혁명위원회가 중앙정보부가 포함된 통치체제 안을 통과시킨 다음날 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면서 “정보부 창설팀은 서울시내 여관을 옮겨다니며 일했다, 5월 23일 태평로 서울신문사 옆 국회 별관(지금의 파이낸스센터 빌딩)에 정식으로 사무실을 열었다”고 회고했다.(중앙일보 2015.4.3)

3선 개헌안 새벽에 날치기로 처리
국회 제3별관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1969년 3선개헌 때문이다. 5·16 쿠데타로 출범한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3선 연임을 제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이 조항을 바꾸는 3선개헌 작업에 들어갔다. 개헌 작업은 일찍부터 치밀하게 추진됐다. 1967년 12월 17일 당시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면서 “이 같은 지상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연임조항을 포함한 현행 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것이 연구돼야 한다”고 운을 뗐다.

야당의 극렬한 반대는 당연했고,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조차 반대가 많았다. 여당 내 3선 반대의 핵심은 당의장이던 JP였다. ‘차기’를 노리던 JP로서는 일면 당연했다. JP계는 공화당 내 사조직을 통해 후계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안 박정희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모두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중앙정보부장의 공작으로 JP는 당의장에서 물러나 부산 바닷가로 내려가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JP를 후계로 준비하던 세력은 모두 제명됐다. 이 내용은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김경재 지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형욱은 ‘3선개헌은 유신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폭로했다.

서울시의회 한쪽 구석에 있는 부민관 폭탄의거 표석

 


하지만 JP세력은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권고 결의안’에 동조하는 이른바 ‘4·8 항명파동’을 일으켰다. 다시 항명한 현역의원 5명을 비롯해 93명의 당직자가 제명되면서 사실상 JP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손발을 모두 잃은 JP는 박정희의 3선개헌에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 중인 회고록에서 “1969년 3선개헌 정국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대의견을 전하자 자신의 손을 잡더니 ‘나와 같이 죽자고 혁명했지, 끝까지 나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야당의원까지 ‘매수’한 여당은 69년 8월 14일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여당의 강행처리와 이를 막으려는 야당의 처절한 사투가 이어졌다. 심지어 야당은 변절한 3명의 국회의원을 제명시키기 위해 당을 스스로 해산하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9월 13일 야당의원들은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국회 본회의장 앞에는 3000여명의 시민·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월요일인 15일 국회 본회의를 열겠다고 선언하고 떠났다.

그러나 공화당 의원들은 일요일인 14일 새벽 2시30분 건너편에 있는 제3별관으로 모였다. 122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찬성 122, 반대 0으로 불과 2분 만에 개헌안은 날치기 처리됐다. 속기사 1명과 사전에 몰래 부른 기자 몇 명만 이 현장을 기록했다. 이때 유명한 것이 전등까지 끄고 의사봉이 없어 주전자 뚜껑으로 ‘땅땅땅’ 세 번 내리쳤다는 것이다.

 

지하도 입구에 있는 4·19혁명 중심지 표석

 


1985년 철거 후 파이낸스빌딩 들어서
이렇게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협박과 회유’ 분위기에서 국민투표에 회부됐다. ‘혼란이냐 안정이냐’는 협박선거와 밀가루와 현금을 뿌리는 금품선거였다. 이 때 공화당 조직을 통해 지구당별로 수십만 달러가 지급됐고, 개헌을 위해 정부가 1500만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 자금은 1968년~69년 도입된 상업차관에서 충당됐다는 주장도 있다.(김정원, 한국분단사)

이후 국회 제3별관은 장기집권을 위한 날치기 처리 단골 장소로 활용됐다. 이후 1971년 12월 27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가지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날치기 통과된 장소도 바로 여기다. 그리고 이는 곧이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키는 유신체제로 가는 바탕이 됐다.

헌정사의 현장이던 국회는 1975년 9월 한강의 가운데 조그만 섬 여의도로 옮겨갔다. 태평로 정치시대가 끝나고 여의도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물은 서울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1991년 지방자치 도입 이후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날치기와 장기집권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국회 별관은 1980년 일부가 철거됐다가, 1985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은 한국 금융의 중심, 파이낸스빌딩이 들어서 있다.

정부는 최근 이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있는 국세청 남대문별관을 87년 만에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이 건물은 1937년 일제가 지어 조선총독부 체신국으로 쓰던 볼품 없는 건물이다. 정부는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는 슬픈 역사, 치욕의 역사도 복원되고 기록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태평로 서울시의회 건물도 날치기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집권의 말로가 어떠한지 교훈을 얻지 않을까. 하지만 서울시의회 건물 어디에도 이러한 정치사의 현장이라는 설명이 없다. 시의회 건물 앞에는 등록문화재로 언제 어떤 건축학적 의미가 있는지만 간단하게 설명한 플라스틱 안내문이 있을 뿐이다.

학생들도 견학 오고, 또 현대사 마케팅이 유행하는 요즘이지만 이곳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벌어진 현대 정치사의 갖가지 현장과 의미를 설명하는 최소한의 안내 팸플릿조차 갖춰지지 않았다. 화단에 있는 부민관 폭탄의거 현장이라는 표석도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에 비해 서울시의회 건물 안 정면에는 역대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기록해야 할 역사,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는 없고, 엉뚱한 시의원들 이름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이곳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현대사의 중요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라는 의미가 중요한가, 아니면 저기 시의원 명단이 중요한가”라고 질문하자 시의회 공보실 관계자는 아무 말도 못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역사의 현장을 바로 복원한다며 수천억원짜리 건물까지 허물면서, 기존에 있는 역사의 현장은 최소한의 안내문도 없이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정의의 깃발 드높이 들고,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어, 우정의 다리를 월남에 놓고… 우리는 비둘기 대한의 용사.”

1965년 2월 9일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서울운동장(1984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뀜)에서 출발한 비둘기부대 파병용사들은 종로를 거쳐 시청앞까지 행진했다. 길가 빌딩 옥상에서는 꽃종이가 뿌려지고, 유명 영화배우들은 행진하는 군인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줬다. 이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감격적이고 선동적인 멘트를 쏟아낸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많이 보던 장면이다. 특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으로 이어지는 ‘맹호는 간다’라는 노래는 방송은 물론 극장·마을 스피커에서까지 울려퍼졌다.

 

근현대사와 함께한 동대문운동장은 모두 헐리고 그자리에는 공원과 역사관,

그리고 한국 디자인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멋진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300년 만의 해외파병, 한국이 먼저 제의
베트남 파병은 해방 이후, 아니 조선 효종 때 청나라의 요구로 후금 근거지인 흑룡강에 조선 조총수 수백명을 파병한 이래 근 300년 만의 해외파병이었다. 이후 1991년 1월 쿠웨이트에 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이 참전하고, 소말리아, 앙골라,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등의 해외파병으로 이어졌다.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현 한국군 해외파병은 총 16개국 17개 지역에 1436명의 부대와 장병”이라며 “대표적으로 필리핀 아라우부대, 레바논 동명부대, 소말리아 청해부대 등 6개 부대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무려 8년 동안 한국군만 연인원 32만명이 파병돼 전사 5099명, 부상자 1만962명의 피해를 낸 대규모 전쟁이었다. 미군 측으로 봐서도 미군은 한국전에서 3만여명이 죽었지만, 베트남전에서는 5만여명이 전사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가 참전한 것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 공개된 각종 기밀문서와 연구에 의하면 베트남 파병은 우리가 먼저 미국에 제안한 것으로 돼 있다. 첫 언급은 5·16 쿠데타 직후 11월 13~17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해 가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비공식 정상회담에서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수 있으며 만약 정규군의 파병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지원자들을 모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국가기록원, 박정희 정부 정상외교) 하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깊숙이 개입하기 전이어서 한국 측 제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박 의장이 미국에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한 것은 5·16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미 박 의장은 극비리에 장교를 베트남에 파견, 한국군 파병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KBS <역사스페셜>이 발굴한 ‘M-21 파월단 대월남 정부 건의서’라는 당시 2급 비밀문건에 따르면 의료진과 공병부대로 시작하는 파병의 구체적인 계획이 만들어졌고, 군 고위층과 정치권 설득 계획까지 짜여져 있었다.

1965년 2월 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3만여명의 국민들이 비둘기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축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미 치밀한 사전계획이 서 있던 우리는 신속히 파병을 추진했다. 1차 파병은 1964년 9월 11일 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비전투요원이었다. 2차 파병은 사진처럼 1965년 비둘기부대가 서울운동장에서 환송식을 갖고 3월 10일 인천항에서 월남으로 출발했다. 미국이 점점 베트남전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미국의 파병 요청은 늘어났고 결국 전투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1965년 8월 13일 전투부대 파병안이 여당인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파병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이며,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다”고 파병의 당위성을 독려했다. 야당의 파병 반대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 <사상계> 사장 정도가 반대했을 뿐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통하는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은 “베트남 파병은 굉장히 큰 사건인데도 반대가 많지 않았다”면서 “한·일 문제하고 또 달라서, 반대하고 싶어도 반공주의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미국의 젊은이들이 ‘가열차게’ 반전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한국 젊은이들은 ‘자랑스럽게’ 베트남 정글로 들어갔다. 맹호부대(보병수도사단)가 65년 10월 16일, 백마부대(보병9사단)가 66년 9월 22일, 청룡부대(해병2여단)가 67년 12월 12일 계속 파병됐다. 도미노 이론(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이웃 나라도 연이어 공산화된다는 이론)에서 베트남에 이어 일차적 공산화 대상으로 꼽히던 필리핀마저 1969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해병대 용사들은 베트남으로 떠났다.

전쟁의 참상은 말해 무엇할까. 한 무명 청룡부대 병사는 이렇게 시를 썼다. ‘조명탄이 눈부시고 포(砲) 소리는 이어진다/어디서 날아온 적탄이 전우를 앗아가면/이를 갈며 분노에 몸부림친다/선혈 얼룩진 임자 잃은 철모/병사의 체취도 가시지 않은 탄띠가 주인을 절규한다… 전우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분노에 떨며/사나이의 눈물을 뿌린다/이역(異域)의 화약내 나는 밤하늘 아래서.’

 

동대문운동장 역사관에서 자원봉사자가 관객에게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와 현재를 설명하고 있다.

 


‘라이따이한’ 문제 풀어야 할 과제
당시 베트남 파병에 반대가 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돈 벌러 간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점도 있다. 실제 장교들은 베트남에 먼저 가려고 로비를 할 정도였다. 이렇게 베트남으로 간 군인과 기술자들이 송금한 돈은 한국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이런 여러 부문의 총수입이 10억3600만 달러로 나온다”면서 “일본에서 들어온 청구권 자금(이 중 이른바 무상) 3억 달러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돈”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정확히 그 액수를 따지기 어렵지만 미국이 지원한 저금리의 공공·상업차관도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것을 모두 합해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이득이 23억 달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찌 됐든 이 자금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발전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자됐다.

하지만 역사학자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베트남전이 한국 경제 중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박태균은 “베트남 파병 군인들과 기술자들의 월급으로 국내 저축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기업이 속출하고, 1972년에 가서는 급기야 8·3 조치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라며 “군인과 기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그것도 한푼 한푼 아껴서 보낸 돈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박태균의 베트남 전쟁, 한겨레신문 2015년 4월 17일자)

베트남 파병은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베트남 참전 대가로 얻은 10억 달러는 이 땅의 젊은이 5099명이 숨지고, 1만962명이 부상한 대가다. 이 밖에 8만여명에 이르는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도 발생했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던 파월 제대군인들은 1992년 9월 26일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을 점거하는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겨우 1993년 고엽제 피해보상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이 역시 우리가 부담해야 할 부정적 유산이다.

게다가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한동안 비동맹 제3세력으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됐으며, 미국의 용병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 당시 한국군과 한인 기술자들이 베트남 여성과 사이에 낳은 2세 ‘라이따이한’ 문제와 전투 중 민간인 학살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다.

DDP는 디자인 박물관·전시관·둘레길·놀이터 등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을 한번에 볼 수 있다.

 

 


훈련도감 자리, 지금은 디자인 메카로
전쟁을 벌인 우리와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대사급 국교를 수립했다. 베트남에서 대사관이 철수한 1974년 4월 29일 이후 18년 만이었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베트남전을 평가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진보적 역사학자 서중석도 베트남전에 대해 “아마 한국 현대사 중에서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면서 “경제적인 면으로 혜택이 너무나 컸는데, 그렇다고 ‘베트남에 가기를 잘했다’고 가르치기도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평가했다.(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프레시안)

당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은 베트남으로 떠나는 비둘기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용사들의 장도를 축하하는 장소였고, 또 이들이 무사히 귀국해 환영식이 열린 안도의 장소이기도 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종로길을 거쳐 시청앞으로 이어지는 시가행진 길은 국민을 동원하는 상징적 통로였다. 그때 서울운동장과 야구장 등은 모두 헐리고 과거 흔적은 2개만 보존돼 전광판과 성화대 정도만 남았다. 그 자리에는 2013년 11월 이라크 출신 건축 디자이너가 설계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다. 지하 3층, 지상 4층의 이 건물은 우리 풍경화처럼 단절되지 않고 흘러가는 ‘환유의 풍경’이라는 주제로 설계됐다고 한다. 패션, 공연, 영화 등 이곳은 대한민국 디자인의 메카로 통하고 있다.

다행히 이곳 역사를 보존하는 조그만 전시관이 남아 있다. 동대문운동장 역사관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하는 조승한씨(73)는 “원래 이곳은 조선조 이성계가 훈련도감을 두었던 자리로 1925년 일제가 경성운동장으로 만들었다”며 “최초의 근대식 축구경기는 물론 1949년 7월 5일 백범 김구 국민장 등이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설명했다. 이 역사관 한편에는 ‘역사의 무대가 된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제목으로 스스로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1950~1970년대 서울운동장은 국가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각종 행사가 열렸다.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1년 뒤에는 5·16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베트남 참전용사 귀국 환영행사와 KAL기 피격 희생자의 합동 위령제도 열렸다. 동대문운동장은 근현대사의 중요한 마디마디와 함께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맞는 봄비는 싱그럽다. 마로니에는 프랑스어로 ‘달고 큰 밤나무’라는 뜻이다. 지중해가 원산지로 7개 잎에 밤과 비슷한 열매를 맺는데 ‘천재’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이곳 마로니에 공원은 1924년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학에서 시작됐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 한쪽에는 1931년 준공된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이 이곳의 과거를 증명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적 한국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이 건물은 해방 후 서울대 본관을 거쳐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사용하고 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거행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수령이 200년 가까이 된 마로니에 나무가 몇 그루 있다.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이름도 이 나무에서 비롯됐다. 경성제국대학 시절 심어진 마로니에 나무는 서울대가 1975년 1월 관악산 계곡으로 이전한 뒤에도 이곳을 지켰다. 이 마로니에 나무는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 이 땅의 ‘저항하는 젊은 지성의 역사’를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꼭 51년 전 이맘때다. 5·16 쿠데타를 성사시킨 세력은 은밀히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일본의 자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1963년 12월 17일 취임식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초부터 한·일 교섭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64년 2월 28일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이라는 초스피드 한·일협정 타결계획을 밝혔다.

마로니에 공원의 200년 가까이 된 마로니에 나무는 이곳 현대사의 현장을 말 없이 지켜보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옛 서울대학교 터라는 설명과 당시 교사 배치 모형이 남아 있다.

 


일제 36년 수탈을 불과 3억 달러 보상으로 끝낸다는 정부의 계획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우리 어민들의 어업을 보장하는 해상 경계선 ‘평화선’을 포기한 것은 어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협정이었다. 야당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한·일협정 체결 저지에 나섰다. 특히 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사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은 5·16 쿠데타의 성격과 본질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박정희 체제의 민주공화당이 내건 정치이념 ‘민족적 민주주의’도 애매모호했다. 한국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민주주의를 내용적으로 제한하자는 의미로 통용됐지만 분명한 실체도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점차 쿠데타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박종열 전 간행물윤리위 심의실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혁신계와 학생운동권에서 불확실한 첩보에 현혹된 일부 세력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조직책이었고, 김종필(JP)도 서울사범대에서 운동을 했다는 것이었어요. 박 정권의 진보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는 ‘민족적 민주주의는 군사파쇼가 자기 은폐를 하기 위한 지능적 연극이다’라는 걸 만천하에 알려야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극적으로….”(신동호, ‘6·3세력의 뿌리’)

3월 24일 서울·고려·연세대 학생들이 5·16 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교별로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학생시위는 대학들이 서로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규모도 열기도 확대됐다. 5월 20일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모였다. 삼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검은 관을 멘 대학생들이 바로 이 마로니에 나무 아래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당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강행, 군정의 기만정치 규탄’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현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6·3 사태의 정점이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쿠데타 이후 다시 대학에 진입한 군인들
“대일굴욕외교반대전국학생총연합 주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는 20일 하오 2시경 당국의 강력한 반대 및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강행됐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열린 이 성토대회에서 4천여명(학생 3천, 일반 1천명)의 군중들은 현 정부를 군사정부의 변신으로 규정하면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경찰기동대가 학교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단행된 이 대회는 개회사 선언문 낭독에 이어 민족적 민주주의를 가장시키는 조사 낭독 등으로 진행됐다. 학생들은 그동안 군사정권이 기만정치를 해왔다고 비난했다.”(경향신문 1964년 5월 20일)

이 장례식에서 읽힌 조사(弔辭)는 당시 서울대 학생이던 시인 김지하가 썼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았다… 박 의장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여! 너의 본질은 곧 안개다!”로 된 이 조사는 매우 유명한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김지하는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 정권을 아예 초장부터 시체요, 썩어가는 송장으로 단정해 일단 죽이고 들어갔다”면서 “이 노골성이 그들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박 정권의 고위층까지도 ‘이런 죽일 놈!’ 했다고 한다”고 기록했다.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이 앞에 섰고, 검은 관을 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다. 경찰기동대의 최루탄이 발사되고, 학교로 쫓겨 들어온 학생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시위에서 투석전이 벌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시위는 4·19 학생혁명 이후 사실상 첫 대규모 시위로 이후 무수히 많은 대학생 시위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5월 27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40여명이 이곳에 있던 4월 학생혁명기념탑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6월 3일 서울에서만 5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시위에 돌입했다. 시위 구호도 ‘굴욕적인 한·일회담 결사반대’에서 ‘박정희 정권 퇴진’으로 바뀌었다. 밤 9시40분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5·16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다시 군인이 대학 캠퍼스에 진주한 이른바 ‘6·3 사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주도한 JP를 6월 5일 공화당 의장직에서 사퇴시키고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보냈다. 하지만 군인이 대학에 진주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정부는 2학기가 개강하자 계엄령보다 한 단계 낮은 위수령을 발령해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 6·3 시위를 주도한 세력을 보통 ‘6·3 세대’라고 부른다. 6·3 세대는 1960년 4·19 학생혁명을 주도한 4·19 세대와 함께 우리 정치사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1931년 건축된 옛 경성제국대학 본관 건물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공연장과 미술관 즐비한 문화의 거리로
당시 정부는 왜 무리하게 한·일회담을 추진했을까. 당시 한·일회담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처음부터 실무를 맡고 나중에 민정 이양 이후에도 공화당 당의장으로 계속 이어서 추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신문에 회고록을 연재 중인 JP는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對日) 청구권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회담 추진 이유를 밝혔다.(중앙일보 2015년 4월 29일)

일제 36년의 침략에 대한 보상금을 받아 경제개발에 투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이 대일청구권 3억 달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에 쓰였고, 근대화의 기초가 된 것은 사실이다. JP는 야당과 시민·학생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밀어붙인 이유도 밝혔다. 그는 당시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에 비유되기도 했다. JP는 “그래, 내가 하자. 혁명에 목숨까지 바친 놈인데 무슨 비난을 받든 뭐가 두려운가. 욕을 할 테면 해라.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움직인다. 내가 길을 뚫겠다. 용기도, 배짱도, 발상도 새로 내겠다고 결심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중앙일보)

하지만 한·일회담의 기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추진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1961년 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일본 이케다 총리 회담, 곧이어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방문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즉 한·일회담은 단순히 한·일 사이의 국교정상화 문제가 아니라 한·미·일 3국의 문제였던 것이다.

미 국무부는 1962년 7월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훈령에서 “한국 정부에 청구권에 구애되지 말고 일본의 경제원조를 받아들이라고 전하고, 만약 응하지 않으면 미국의 원조를 다시 고려하겠다고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한·일회담은 단지 경제개발을 위한 자원조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면서 “박정희가 간절히 원했던 5·16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낸 조건 중의 하나였다”고 말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6·3 사태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엿볼 수 있듯이 4·19 학생혁명에서 요구한 민주주의에 민족주의(굴욕적인 대일 및 대미외교)가 결합된 이데올로기였다. 마로니에 공원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6·3 사태의 발원지라는 어떠한 표지도 없다. 단지 서울대학교 터라는 표지(유지기념비)와 당시 캠퍼스 모형만 있을 뿐이다. 서울대를 이전할 때 도심 학생시위의 온상을 관악산 골짜기에 몰아넣어 정권에 저항하는 젊은 지성을 잠재우려 한다는 반대도 많았다.

 


이곳 서울대 문리대 터는 민족·민주주의 의미보다 예술의 거리로 바뀌었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하고, 1985년 이 일대를 ‘대학로’라고 이름 붙이면서부터다. 모두 천재가 되라는 의미로 대학 교정에 심었던 마로니에 나무는 이제 ‘낭만’의 상징으로 변했다. 최근에는 자본력이 약한 공연장이 속속 문을 닫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곳엔 공연장과 미술관이 즐비하다. 51년 전 6월 젊은 지성의 함성을 지켜본 이 마로니에 나무는 2015년 5월에도 일곱 개 잎을 푸르게 물들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남산은 한강과 함께 600년간 수도 서울을 내려다보며 한민족의 질곡과 함께한 존재다. 불과 해발 262m에 불과한 야산이지만 남산은 나라의 제사를 올리는 성스러운 산이자 성곽과 봉수대가 있어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근세 들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는 애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남산’이라는 고유명사는 시골사람들에게는 ‘서울’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들어 남산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었다. 이 시기 남산은 정치인과 지식인에게 정치공작과 고문을 떠올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됐다. 이렇게 된 배경은 바로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다.

일제 통감 관저 자리에 정보기관 들어서
4·19 학생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정부는 정보기관이 필요했다. 더 이상 군과 경찰 정보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미국 CIA와 일본 내각조사처 같은 정보기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군과 경찰 정보국의 견제가 심했다. 그래서 입법도 안 된 상황에서 예산 배정도 없이 총리실 예산으로 만든 것이 바로 중앙정보연구위원회다. 장면 총리는 1961년 1월 이후락 육군 소장을 예편시켜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책임자인 연구실장에 임명했다. 사무실은 중구 예장동 4번지 일대로, 원래 이곳은 일제강점기 이후 줄곧 통신부대가 있던 곳이다. 통신을 장악해야 정보를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 주변에는 과거 조선총독부 통감 관저가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테라우치와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맺은 곳이다. 무소불위 일제 총독 관저 자리에 무소불위 최고 정보기관이 들어선 것도 ‘운명적’이다.

이후락 연구실장은 대령급 정보장교 몇 명과 대학을 갓 졸업한 20여명의 요원으로 정보업무를 시작했다. 물론 5·16 쿠데타의 진상을 파악하는 임무도 맡았다. 이후락 실장은 5·16 당일 아침 “청량리, 미아리, 무악재, 용산 등 서울과 외곽을 잇는 주요 간선에 인원을 배치하라”면서 “외부로부터 진입하는 쿠데타군 규모와 그들 트럭 지프의 부대마크를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락은 바쁘게 상황을 챙겼다. 그러나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었으므로 이 실장은 미국대사관이나 미8군과 연락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남산의 부장들>

악명 높던 ‘남산의 지하실’(6국 조사실)은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탈바꿈해 서울시민의 안전 컨트롤타워 기능을 하고 있다.

 


5월 18일 이 정보기관에 군인과 김종필(JP) 중령이 나타났다. 책임자 이후락 실장은 반혁명행위로 체포됐다.(하지만 불과 두 달 뒤 이후락은 대한공론사 이사장이 되고,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되는 등 쿠데타 세력에 가담해 승승장구했다)

이틀 후인 5월 20일 중앙정보연구위원회는 간판을 중앙정보부(중정)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기관으로 편입됐다. 부장에는 JP가 취임했고 동기들인 육사 8기들이 국장을 나눠 맡았다. 매우 신속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 위원장을 지낸 가톨릭대 안병욱 교수는 “김종필 중령은 쿠데타가 성사된 5월 16일 아침 10시, 최우선적으로 중앙정보기구에 관한 복안을 제시한 후 곧바로 설치작업에 착수했다”고 증언했다.

이것이 ‘남산의 부장들’ 즉 중정의 시작이다. 중정은 처음에는 5·16 쿠데타 후의 수사와 경찰·검찰 지휘를 맡다가 점차 대공 및 정보 수집으로 업무를 확장했다. 그리고 1963년 민정이양 이후 중정은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첩보·수사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중정부장 관저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언덕에 설치된 세계인권선언문. 하지만 이곳이 과거 중앙정보부 자리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

 

 


공포의 고문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무소불위의 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우는 애도 정보부장이 온다고 하면 뚝 그친다’는 비유도 이때부터 나왔다. JP는 최근 신문에 연재하는 회고록에서 중정의 창설 이유로 “혁명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중앙일보 2015·4·3> 중정이 강력한 공포정치의 도구로 활용됐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중앙정보부의 최대 무기는 폭력 사용의 무한대 보장, 행정력 동원의 무한대 보장, 자금력 동원의 무한대 보장이었다”고 평가했다.<현대사 산책, 1960년대 2권>

JP는 또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유명한 중정 부훈(部訓)을 지었다. 성경에서 인용한 미국 CIA 표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에서 차용한 것이다. 1997년까지 사용된 이 부훈석은 현재 내곡동 국가정보원에 보존돼 있다.

현재 개방된 남산 옛 중앙정보부 자리를 가보면 그 위세를 실감할 수 있다. 중정은 명동에서 남산을 오르는 요지에 자리를 잡았다. 명산에 터널까지 뚫으며 다소 무질서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다. 대로변 입구에는 중정 감찰실과 서울지부 사무실, 그리고 부장 관저를 지나면 중정 본부 건물, 거기서 좀 더 올라가면 체육관, 터널을 거쳐 더 가면 중정 수사국 건물이 나온다. 남산을 머리에 비유하면 마치 머리 중간중간을 파먹은 모습이다. 그린벨트이며 수도 서울의 명산에 이렇게 무질서하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권력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70년대 중정 창설 기념파티에 모인 역대 중정부장들. 왼쪽부터 김형욱(4대), 김용순(2대), 김계원(5대), 김종필(초대), 김재춘(3대)

 


이 막강한 중정 건물들은 지금 교통방송(감찰실), 서울소방방재본부(중정 서울시지부 및 유치장), 유스호스텔(중정 본부), 서울종합방재센터(6국 조사실), 서울시균형발전본부(중정 6국), 서울시청 별관(수사국), 문학의 집(부장 관저) 등으로 탈바꿈돼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 유스호스텔 직원인 박경서씨는 “이곳은 그린벨트라 일체의 건물 증·개축을 할 수 없어(안전기획부로부터) 물려받은 건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지하는 미로라고 하는 얘기만 들었을 뿐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모두 폐쇄돼 지하 구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과거 지하 고문실의 오명을 지우려 했던 것인가. 유일하게 지하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서울종합방재센터이다. 서울종합방재센터는 입구만 삐죽 나와 있을 뿐 3층의 지하공간 전모는 공개되지 않는다. 과거 지하벙커와 조사실로 썼던, 이른바 ‘남산의 지하실’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을 지키던 청원경찰은 “국가중요시설로, 들어갈 수 없다”며 출입을 통제한다.

1994년 안전기획부(중정)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을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모두 철거하자는 의견에 대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아시아평화인권센터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역사 관련 단체는 옛 통감 관저까지 복원해 일본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의 상흔을 치료하는 장소로 활용하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시의 산하기관이 들쭉날쭉 들어서 있다.

그나마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이 옛 중정부장이 생활하던 관저다. 2층 양옥인 부장 관저는 현재 ‘문학의 집·서울’이라는 이름의 문인들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과거 군부정권 시절 고문과 정치공작의 현장이라는 것을 알리는 종합적인 안내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유스호스텔 앞의 조그만 표석과 건물 정초에 새겨진 과거 중정부장의 이름만이 이곳이 과거 중정 자리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사실 중정이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정권 안보를 위해 정치에 개입한 것이 문제였다. 전북대 교수 강준만은 “민주공화당 창당의 모태는 중정”이라며 “만약 중정의 자금조달이 없었다면 군사정권은 채 6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다.<현대사 산책>

 

과거 중정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바뀌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는 모두 봉쇄돼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중정부장 관저는 문인들의 공간으로
하지만 중정을 통해 18년간 견디던 체제는 중정부장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남산의 부장들>을 쓴 김충식은 이를 “정보 만능으로 유지되던 박정희 정권은 결국 정보 중독증상으로 무너져 버렸다”고 표현했다. 참 적절한 표현이다. 결국 박정희 정권 18년은 중정으로 시작해 중정에 의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몇 차례 변신이 있었다. 이름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바뀌고, 정권교체도 있었다. 최고책임자가 자해하고 구속되기도 했다. 결국 2010년 10월 국정원은 <과거와의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반성문’을 냈다.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은 이 책 서문에 “우리가 만들어낸 과거에 대한 쓰라린 성찰 없이는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국정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국정원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김 국정원장은 “진실을 밝히고 잘못된 고해성사가 선행돼야 한다”면서 “국민들이 다시는 공권력으로부터 아픔을 겪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이 ‘반성문’은 관련자들의 증언과 현장방문, 기록 검토 등을 통해 과거 중정의 정치공작을 낱낱이 밝혔다. 무려 6권 3315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를 통해 <경향신문> 매각, 인혁당 사건 등 간첩조작사건, 야당 지도자 납치·살해 정치공작의 진실이 밝혀졌다. 특히 영원한 미스터리로 묻힐 뻔한 남산의 부장 김형욱 살해과정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최근 국정원은 가혹행위를 통해 간첩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다시 물의를 빚고 있다. 남산 중정부장 관저에서 본관으로 올라가는 언덕 축대에 쓰여진 세계인권선언 제30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정원장이 한 번쯤 이 길을 걸으며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