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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현대사 르포

[광복 70년 역사르포](19)원주 원동성당-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유신 항거 ‘행동하는 신앙’ 태동하다

지난해 <강원일보>가 창간 69주년을 맞아 강원도민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전국 평균보다 무려 5.8%포인트 높았다. 또 ‘스스로 어떤 이념적 성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보수(37.7%)라는 응답이 가장 많고 중도(29.7%), 진보(21.9%) 순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전국 조사 결과(중도 37.8%, 보수 29.7%, 진보 16.7%)와 비교해 강원도민의 정치성향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강원일보 2014년 10월 24일)

강원도 원주시는 도시라서 그나마 보수색채가 옅지만 이곳 국회의원 두 사람 모두 보수여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원주 역시 보수적 정치성향의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원주는 1970년대, 특히 유신시대를 통해 가장 야성이 강한 도시, 민주화를 열망한 저항의 도시였다. 1960년대 4·19 학생혁명 국면에서 마산·부산이 민주화의 발원지로, 1980년대 이후 전남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평가된다면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의 성지는 강원도 원주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명동성당보다 오래된 근대문화유산
원주가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발원지는 바로 원동성당이다. 시골도시의 조그만 원동성당은 민주화 역사에서 서울 명동성당을 능가하는 거대한 씨를 뿌렸다. 사실 원동성당은 서울 명동성당보다 2년 앞선 1896년에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됐으나 복원돼 현재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제139호)으로 등록돼 있다.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이곳 원동성당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 발표한 ‘전국 가톨릭 교우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는 “물가고, 세금고, 저곡가, 저임금, 중소기업의 대량도산, 대량실업 등 모든 경제파국 현상도 바로 그 원인이 부정부패에 있다”면서 “사랑인 그리스도교적 사회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패배주의, 투항주의, 굴종의 감상적 신앙생활을 박차고,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사회정의를 위해 일어납시다, 싸웁시다”라고 주장했다.(원동교회 100년사, 1998년)

 

 

원주 원동성당은 원주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종탑이 돔형이고 폭에 비해 길이가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시위는 연좌 성토대회, 가두시위, 철야기도회 등 3일간이나 계속됐다. 이는 한국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한국 가톨릭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순순히 따랐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 의사를 비판할 정도로 체제 순응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반공을 앞세웠으며 현실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지 주교와 함께 일했던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이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1965년 제2차 바티칸공회가 끝나고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되면서 지 주교가 취임했다”면서 “지 주교는 바디칸 공회가 요청하는 현대화된 교구를 만들기 위해 교구 원로와 신자들과 교회 개혁에 나섰다”고 말했다. 지 주교는 현실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공회 정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권의 보복은 시작됐다. 1972년 10월 26일 지학순 주교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다 계엄사령부에 연행됐다. 지 주교는 곧 풀려났지만 ‘유신’으로 무장한 정권의 보복은 집요했다. 결국 1974년 7월 6일 긴급조치 1·4호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중정)에 연행됐다.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원동성당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특별기도회가 열렸다. 7월 10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주교회의가 열려 “정의의 실천은 주교의 의무”라며 지학순 주교를 지지하고 전국 교회에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를 호소했다.

 

1975년 2월 지학순 주교가 석방된 후 시인 김지하와 함께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실모순 고발 시위 나선 지학순 주교
7월 16일 정권은 지 주교를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은 지 주교는 김수한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양심선언에서 “소위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 주교는 당일 다시 연행됐고,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들이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의 투쟁은 한국 가톨릭의 전환점이 됐다. 7월 25일 주교회의에서 주교의 고통에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프랑스 대사가 참석한 시국 미사가 열렸다. 하지만 지 주교는 8월 12일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이 모였다. 밤을 새는 열띤 토론 끝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튿날 사제단의 이름으로 신도 1500명이 참석한 첫 기도회를 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를 기억하는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가두시위는 워낙 삼엄한 경찰의 제지로 도심으로 가지도 못하고 300m 앞 인동사거리 정도에서 멈췄다”고 말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정면으로 맞선 원동성당은 지금 조용한 시골도시의 성당으로 돌아와 있다.

 


이것이 사실상 정의구현사제단의 첫 탄생이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식 탄생은 이틀 후인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제1시국선언 발표부터로 삼고 있다. 제1시국선언문 핵심 내용은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인사 즉각 석방’, ‘국민 생존권 보장과 언론·보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서민대중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정책 확립’ 등이다.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한 이들은 신부, 신도 등 2000여명과 함께 십자가를 앞세우고 시위에 나섰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1월 6일 제2시국선언, 11월 20일 사회정의실천선언 등으로 이어졌다.

지 주교는 226일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1975년 2월 18일 석방됐다. 그의 원주 귀향을 맞기 위해 3만명의 원주시민이 원주역 앞에서 기다렸다. 당시 원주시 인구가 10만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대단한 환영인파였던 것이다. 지 주교가 원동성당에 도착할 때 한 청년이 외투를 벗어 길에 깔자 너도나도 외투를 벗어 길에 까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습과 비슷했다고 한다.

강원 원주가 1970년대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된 것은 지 주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지만 지역 출신 장일순의 역할도 컸다. 서울대 미학과에 다니다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장일순은 고향에 내려와 원주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했다. 장일순은 평소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 5·16 직후 3년간 투옥되기도 한 진보적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이 원동교회 신도로 지학순 주교와 만난 것이다.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300여명의 사제들과 신도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미사를 드리는 모습. / 원동성당 100년사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에서 중요한 역할
원주가톨릭센터 관계자는 “1965년 지 주교가 이곳에 와서 신도였던 장일순 선생을 만나 교회개혁과 부정부패 추방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을 추진했다”면서 “지 주교 구속의 빌미가 된 민청학련사건 시인 김지하가 바로 장일순의 학교 제자였다”고 말했다. 결국 1970년대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시인 김지하로 이어지는 인맥이 원주를 반유신의 구심점으로 만든 것이다. 이즈음 지역 국회의원도 신민당 박영록 의원이 계속 당선될 만큼 원주는 야성의 도시였다. 1980년 광주 참상을 고발하고 쫓기던 김현장과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이 원주에 숨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원주의 반유신 정서 때문에 가능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후에도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을 하다가 1993년 지병으로 선종했고, 장일순 선생은 1980년대에는 한살림운동과 생명사상운동을 펼치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문서화된 규약이 없다. 단지 ‘하느님과 정의를 위해 투신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사제단에 참여할 수 있다.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 무수히 많은 일을 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을 빼놓고는 기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정의구현사제단 홈페이지에 기술된 단체 소개에 그간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저희는 창립 후 지금까지 모순된 현실 안에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양심이 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하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횃불로서의 역할을 받아 안으며 많은 사제들이 3·1 민주구국선언, 5·18 광주 민주항쟁 등으로 옥고를 치렀습니다. 특히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제하의 성명서 발표는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70~80년대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80년대 말부터는 통일운동으로, 90년대 들어서는 교회쇄신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였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오만과 독선 이명박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는 시국선언 발표(2010년 5월), 박근혜 정부에서는 불법 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2014년 2월)·쌍용자동차 희생자를 위한 225일간의 기도(2014년 2월)·통합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폭거라는 선언 발표(2014년 12월)·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요구(2015년 5월) 등 주요한 사건과 고비마다 ‘용기 있는 소금’ 역할을 했다.

‘길 위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해 온 정의구현사제단은 “앞으로도 저희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과 인권,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