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갑작스런 대통령 특별선언이 예고됐다. 국민들은 TV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박정희 대통령은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아들여…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라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날 대통령 특별선언은 헌법을 중단하고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을 대신하는 비상조치를 취한다는 것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즉각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과 방송, 출판은 사전 검열이 시작됐다. 세종로 국회의사당 앞에는 탱크가 진주해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았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시킬 권한이 없었는데 국회를 해산한 ‘헌법 파괴’가 자행된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헌정질서가 바뀌면서 제3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대한민국 헌정사는 장기집권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노욕’에 의해 유린되고, 파괴되고, 결국 누더기가 됐다. 이승만은 재선을 하기 위해 발췌개헌을 했고, 3선을 하기 위해 2차 사사오입 개헌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을 가두고, 절차도 거치지 않고 기립표결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 결국 4·19 학생혁명으로 그 ‘노욕’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올해 1월 17일 알루미늄 패널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장충체육관은 체육문화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제4공화국 네 번의 대통령선거 치러
내각책임제가 도입돼 권력 분점시대가 잠깐 있는가 했지만 곧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리고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는 재선을 거치고 ‘노욕’에 가득차 3선을 넘었다. 하지만 노욕은 3선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종신 대통령, 영원한 권력을 추구한 것이 바로 유신이다. 유신체제는 한 절대권력자의 ‘영원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체제였다.

그 영원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간선제 선출방식이다. 유신체제에서 상징적 용어는 바로 ‘체육관 선거’라는 말이다. 유신체제에서 박정희가 두 번, 그리고 최규하·전두환 두 정권으로까지 이어진 ‘체육관 선거’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이 네 번의 체육관 선거는 제4공화국 대통령 선거 전부였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적신호가 켜졌다. 온갖 관권·금권선거를 동원했지만 국민들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꼈다. 당시 중앙정보부 선거전략 참모인 전재구는 4월 7일 이후락 부장에게 “각하의 업적은 모두 인정하는데 장기집권이 염증이에요, 감표 요인이 분명합니다. 지방 중정 분실장과 기관장, 말단공무원, 유지들이 한결같이 ‘마지막 출마’ 선언을 하길 희망합니다. 대통령 각하에게 꼭 건의해 주십시오”라고 보고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2012)

 

1972년 12월 16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박정희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수용하지 않다가 결국 투표 막바지인 4월 25일 서울 장충단 유세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이며 후계자를 기르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94만여표 차) 승리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선거유세 때 했던 ‘마지막 출마’ 약속을 휴지처럼 내버렸다. 그리고 편법을 통한 장기집권 구상,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계획했다. 그것이 1972년 5월 중앙정보부장 안가가 있는 궁정동 밀실에서 시작된 이른바 ‘풍년사업’이다.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이후락 정보부장, 청와대 홍성철·김성진 비서관, 신직수 법무장관과 헌법학자 한태연과 갈봉근 등이 그들이다. 8월 개헌 기본 구상이 완료되자 본격적인 헌법 조문작업이 시작됐다. 그때 김기춘 검사(최근 청와대 비서실장 역임)가 조문작업에 참여했다.

투표율 100%에 득표율 99.9%
드디어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풍년사업이 공개되고, 열흘 후인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유신헌법’이라는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내놓았다. 유신헌법은 11월 21일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의 찬성으로 확정됐다. 체육관 선거의 유신헌법은 이렇게 삼엄한 계엄하에서 만들어졌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직선제에서 지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다.

12월 23일 전국에서 뽑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한 명도 빠짐 없이 장충체육관에 모였다. 이 체육관 선거에서 단독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99.9%의 득표율(2357표 득표, 무효 2표)로 당선됐다. 장충체육관과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으로 통하는 통로에 ‘장충체육관 역사전시관’이 있다. 여기에는 8대 대통령선거 과정을 ‘대통령 선출을 위한 투표는 오전 11시55분경 전 대의원의 투표가 끝나고 12시부터 개표에 들어가 오후 12시35분에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0월 17일 세종로 국회의사당 정문을 계엄군의 탱크가 막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유신체제의 특징은 대통령을 입법·사법·행정 3권 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정회라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었다. 법관 추천제도를 폐지하고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했다. 대법원의 위헌법률심판 권한도 헌법위원회로 넘겨 사법부가 무력화됐다. 지방자치제도는 폐지됐고, 노동3권은 제약됐다. 이에 비해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나고 연임제한도 없앴을 뿐 아니라 헌법을 능가하는 긴급조치 발동권까지 부여했다.

유신체제는 3권분립이라는 견제와 균형은커녕 오직 단 한 사람의 영구집권만 가능케 한 체제였다. 역사학자인 최상천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유신체제는 일본의 천황처럼 한 개인이 국가 위에 올라타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최상천, 박근혜 바로보기, 2012)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78명이 또 장충체육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2577표(무효 1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다시 당선, 제9대 대통령이 됐다. 단일후보에 99.9%의 득표율이었다. 당시 문교부에서 발행한 중학생 교과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공산국가에서도 형식상 선거를 치른다. …입후보자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은 벌써 선거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선거 결과는 항상 99% 이상의 투표율과 99% 이상의 찬성으로 나타난다.”(문교부, 승공통일의 길2) 이 대목을 빗대 대한민국 투표가 북한을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여럿 생겼다.

최상천 교수는 유신체제를 북한 김일성과 함께 가는 ‘적과의 동침’이라고 해석했다. 최상천은 “이 역사적 동침으로 둘은 쌍둥이를 낳았다. 그 이름은 유신과 유일이다. 박정희는 남에서 유신체제를 선언하고, 김일성은 북에서 유일체제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 최상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그렇게 볼 소지가 충분했다”고 평가했다.(강준만, 현대사 산책, 1970년대 1)

장충체육관에서 동국대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마련된 장충체육관 역사관은 이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레슬링과 복싱의 추억, 올해 재탄생
하지만 유신체제는 강력한 국민적 저항을 맞는다. 유신체제는 국민적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초헌법적 수단이 동원됐다. 유신체제를 비방하거나 유신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까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해 군법회의에서 처단했다. 결국 유신체제의 모순은 유신체제를 만든 내부로부터 터졌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절대권력의 심장에 쏜 총으로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문제의 체육관 선거는 이후 몇 번 더 치러졌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1979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8개월 만에 물러났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 전두환 역시 1980년 8월 27일 장충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이 제5공화국 헌법을 새로 만들면서 체육관 선거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장충체육관은 1960년 원래 육군체육관에 직경 80m의 대형 철골 돔을 씌워 국내 최초의 실내경기장으로 개·보수한 것이다.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 끝에 1963년 2월 준공한 장충체육관에 대해 당시 언론은 사설을 통해 “농구, 권투, 탁구, 배구 등을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특징뿐만 아니라, 난방 및 냉방시설을 갖추고 있어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동아일보 1963년 2월 1일)
 
장충체육관은 60~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실내스포츠의 메카로 군림했다. 1966년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참피언 김기수를 탄생시켰고, 1967년 ‘박치기 왕’ 김일 선수의 프로레슬링 열풍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장충체육관은 실내스포츠로 국민에게 기여했지만, 선거를 통한 정치적 이미지는 낙제점이다.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체육관 선거는 곧 정통성을 상실한 권력’이라는 등식으로 자리잡았다.

낡고 비좁았던 장충체육관은 2010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1월 17일 체육문화복합시설로 재탄생했다. 고슴도치 같던 외형은 알루미늄 패널을 입혀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일부 체육대회와 문화행사가 열렸지만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문에 모든 행사가 취소된 상태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근접성과 최신 음향 및 조명시설을 갖추고 있어 스포츠는 물론 공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