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보다 일찍 찾아든 초여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52년 5월 26일 임시수도 부산의 아침이었다. 동래 온천장을 출발한 국회 통근버스는 광복동 동아극장 앞에서 국회의원 30명을 더 태워 모두 47명을 싣고 임시의사당이 있는 경남도청 정문을 들어서려다 집총 헌병들의 검문을 받았다. 26일 0시를 기해 발동된 계엄령 아래선 어떤 차량도 일단 검문을 받아야 한다는 헌병들의 주장에 맞서 1시간을 버티던 국회 버스는 결국 군용 크레인에 의해 사람이 탄 채로 헌병대에 끌려가 몇몇은 국제공산당 음모사건 피의자로 구속됐고, 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던 골수 야당의원 30명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아 한여름 내내 숨어 지내야 했다.

장기집권 위한 첫 번째 개헌의 현장
이로부터 꼭 39일 만인 7월 4일 야당의원이 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 제안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교묘히 혼합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온갖 위협과 탄압에 의해 통과됐다. 이 무덥고 지루했던 39일간의 정치적 혼란이 좁은 의미의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이 개헌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국민 직선으로 재선됐으며, 1960년 4·19로 인해 하야할 때까지 12년 장기집권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임시수도 천일> 부산일보사, 1985)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장기집권을 위한 첫 번째 개헌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렇게 시작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헌정 유린 시말은 이렇다. 1950년 5·30 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하자 내각책임제에서 이 대통령의 재선은 물 건너간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이 대통령은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야당이 우세했던 국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부산 정치파동의 현장인 옛 경남도청(국회의사당)은 동아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헌정사에서 장기집권의 시작을 알리는 장소이지만, 현장에는 당시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없다

 


이에 이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관제데모’를 여는 한편 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의원 50여명을 연행하고 이 중 12명을 국제공산당 관련자로 조작, 구속했다. 심지어 ‘반독재 호헌’을 주장하는 야당의원 회의장에 괴한이 난입하고, 민중자결단이라는 우익단체가 국회의사당을 포위, 80여명의 국회의원을 연금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은 연임을 위한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시민들에게 ‘서울 사수’를 방송하면서 자신은 먼저 한강을 건넜다. 이 대통령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2일, 전쟁이 난 지 불과 일주일 만이다. 7월 17일부터 8월 18일까지 정부 부산 이전작업이 이뤄지기도 전에 이 대통령은 피란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산은 공식 임시수도로 지정돼 1953년 8월 15일 정부가 다시 서울로 옮겨갈 때까지 2년 6개월간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됐다.

헌병이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둘러싸고 있는 장면(사진)을 보면 버스도 미니버스여서 47명이 앉을 좌석도 부족해 보인다. 버스는 경남도청(임시의사당) 정문을 통과해 청사 앞까지 온 상태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1987년 6월 항쟁 모습이 생각난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군 장례로 촉발된 6월 항쟁이 한창이던 6월 26일 국회의원들은 거리투쟁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국회의원과 시위대를 떼어놓기 위해 국회의원을 마구잡이로 연행, ‘닭장차’(투석전에 대비해 경찰버스 유리창을 모두 철망으로 둘러 마치 닭장차 모습과 같다고 그렇게 불렀다)에 싣고 멀리 떨어진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에 혼자 내려놓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YS(김영삼)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가두투쟁에 나섰다가 이 닭장차에 실렸다. 당시 YS가 닭장차에 실리지 않으려고 문을 부여잡고 악쓰는 모습의 사진은 6·10 항쟁의 상징적 장면의 하나다. 사실 YS는 바로 이 부산 정치파동 당시 발췌개헌안을 만든 장택상 의원의 비서였다.



 

1952년 5월 26일 집총을 한 헌병들이 국회의원 47명이 탄 버스를 세우고 검문하고 있다. 헌병들은 이 버스를 군용 크레인으로 끌고가 27시간 30분간 연금했다.

 


당시 대통령 숙소는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여기서 시작된 장기집권의 유전자(DNA)는 우리 헌정사의 불행이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3선 연임을 시도하다 결국 4·19 학생혁명으로 몰락했고,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3선을 넘어 유신을 통해 영구집권에 나섰다가 측근의 흉탄에 사망하는 비극을 맞았다. 장기집권의 폐해가 오죽 심했으면 헌법에 단임제를 명시하고, 당해 대통령은 이 조항을 고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한국 정치에서 장기집권의 DNA가 시작된 이곳은 지금 동아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이 건물은 1925년 일제가 경남도청 청사로 지은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경남도청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사용된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 당시에는 국회도 이 건물에 있었다. 당시 국회는 부산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고, 정부 부처도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1983년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하자 이 건물은 부산지방검찰청과 법원으로 이용됐다. 법원도 거제동 법조청사로 이전하자 동아대학교가 건물을 인수, 2009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건물 주변 어디에도 이곳이 부산 정치파동의 현장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없다. 학기 초 MT를 가는 대학생들만 지나다닐 뿐이다. 박물관 3층 임시수도 정부청사 기록실에 가서 ‘부산 정치파동’ 기록을 들춰봐야 이곳이 바로 한국 헌정사의 비극, 즉 장기집권이 시작된 현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산 정치파동 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바로 이 대통령의 숙소와 집무실이 있었다. 직선거리로 100m 남짓 될까. 원래 경남지사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던 것이다. 아마 이 대통령은 이곳에서 국회의원 버스가 헌병 크레인에 끌려가는 장면을 내려다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왔던 가게 ‘꽃분이네’. 평일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지금은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당시 정치상황을 전시, 기록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이 대통령의 집무실과 숙소, 회의실 등이 당시 모습으로 재연돼 있다. 임시수도 기념관 성현주 관장은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간 1984년 처음 기념관 문을 열었다가 뒤쪽 고검장 관사를 합쳐 2012년 부산시립 박물관 분관으로 재개관했다”면서 “하루 200~250명, 연간 5만5000여명의 시민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애증이 엇갈리는 느낌이다. 이 대통령의 집무실과 재현한 실물 크기 밀랍인형을 보면 이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다. 특히 기념관 앞에 세워졌던 이 대통령 동상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라고 높게 평가하는 글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전시관 내부 설명에는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고 명시한 대목도 있다. 기념관 앞에 세워진 이 대통령 동상은 2011년 6월 3일 붉은색 페인트를 뒤집어쓰는 ‘테러’를 당해 철거된 상태다. 이후 동상의 완전 철거를 주장하는 4·19 단체와 동상 복원을 주장하는 보수단체의 주장이 맞서 동상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경남도청과 대통령 관저가 있던 부암동 일대가 당시 한국 정치의 중심이었다면, 우암동과 국제시장이 있는 신창동은 서민 특히 피란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비록 전쟁통이지만 정치의 중심거리에는 요정과 향락이 있었고, 음모가 있었다. 하지만 피란민이 몰려 있던 우암동과 국제시장 일대는 추위와 배고픔이 있었지만 어울려 살던 정이 배어 있기도 했던 곳이다.

우암동은 영화 <친구>의 배경이 된 동네다. 이곳은 원래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에 반출되는 소를 검역하던 동물검역소와 우사가 있던 곳이다. 부산 사람들은 이곳을 보통 ‘적기’라고 부른다. 원래 적기만인 바다를 매립해 우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으로 피란민들이 몰려오면서 소를 가둬두던 우사가 집으로 개조돼 대규모 피란민 수용소가 됐다. 이 피란민 수용소는 점차 정착촌이 됐고, 병원과 성당이 들어서 지금의 우암동이 된 것이다. 난리통에 피란민만으로 마을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인 셈이다.

기념관이 최근 주목하고 있는 것이 1950년대 부산의 현대사에 대한 학술·현장조사이다. 기념관 성 관장은 “부산의 독특한 역사 이력은 도시생활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특색을 마을 재생사업을 통해 복원하는 사업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관은 부산 부암동과 부산 밀면 등 주로 서민(민중) 생활사에 대한 보고서를 냈고, 앞으로도 피란기 서민의 삶에 대한 연구·조사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한다.

임시수도 부산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은 부산 정치 파동의 현장에서 불과 10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이 대통령의 장기집권 구상이 나왔다.

 


피란민 애환 서린 국제시장 있는 신창동
이것은 현재 부산의 ‘복고 마케팅’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부산시는 부민동 일대를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명명하고, 인근의 40계단 테마거리, 우암동 등에서 추억의 5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요즘에는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됐던 신창동 국제시장이 뜨고 있다. 국제시장은 1948년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으나, 난리통에 미국 구호품과 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밀수품 등의 온갖 상품들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됐다. 없는 것이 없다는 의미의 ‘도떼기시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많은 피란민이 이곳에서 생계를 해결한 것은 물론이다.

그 후 국제시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최근 영화 <국제시장>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제시장을 돌아보는 관광상품도 많이 개발돼 주말에는 사람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관광객이 몰린다. 특히 영화에 나오는 ‘꽃분이네’는 원래 영신상회였던 간판을 꽃분이네로 바꿔 달았다. 평일인데도 국제시장 꽃분이네 앞에는 관광객이 몰려 영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고 한다. 관광객의 사진촬영을 위해 별도 포토존까지 만들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크게 늘었지만 정작 수익은 별로 늘지 않고 오히려 임대료만 올라갔다는 불만도 있다. 이곳에서 음식점을 하는 한 상인은 “영화 이후 상가 임대료가 크게 올랐다”면서 “나중에 이 가게를 살 생각을 했는데 그 꿈을 접었다”고 말했다. 꽃분이네 역시 임대료 문제로 주인과 마찰 끝에 폐업위기까지 갔다. 다행히 임대료 문제는 원만히 해결됐다고 한다.

국제시장에 사람이 몰리지만 매출이 늘지 않는 이유는 국제시장만의 상품이 없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아트타운 작가회원인 아티스트 배천순씨는 “보다시피 꽃분이네에서 팔고 있는 것이 5000원, 1만원짜리 중국 잡화상품들”이라며 “부산 국제시장만의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말했다. 배씨는 또 “꽃분이네 가게 내부와 외부를 전면 개조해 특색 있는 가게로 만들 예정”이라며 “이 작업은 작가들의 재능기부 형태로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