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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아직 망가뜨릴 것이 더 남았습니다

정치는 아직도 10년 전, 아니 5년 전 과거사 탓만 하며 날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국회는 원 구성도 못하고 빌빌거리다가 겨우 들어간 국정감사에서 차관 하나가 ‘땡긴’ 논농사 직불금 문제로 온통 도배하게 만들었습니다. S(서울시)라인이라는 막강한 백을 가진 그 차관은 굳세게도 잘 버티더니 국감이 거의 다 끝나니 나가버리더군요.

외교 문제를 보면, 레임덕에 걸려 거들떠보지도 않는 부시 대통령과 철없는 혈맹관계나 과시하고(대가로 미국 쇠고기는 덜컥 수입하고), 통일 문제에서도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등 화해 분위기지만 우리만 하던 왕래도 끊어버리는 외톨이가 돼 있습니다.

경제 문제요? 독자 여러분이 직접 고초를 당하고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만 바로 얼마 전까지 “문제 없다”며 펀드를 사라고 권유하더니 이제서야 “과거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이실직고하더군요. 우리나라 국가 부도 위험이 브라질, 말레이시아, 심지어 거의 혼돈 상태인 태국보다 높다고 합니다. 소망교회에 다닌다는 경제수장은 국민의 소망을 절망으로 망가뜨려놓고도 진솔한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사회 문제도 그렇습니다. 물대포와 시위 진압 전문 경찰, 명박산성이 등장하고 1970~80년대 ‘법대로’ 용어가 난무합니다. 유모차 시위대의 배후를 캐고 촛불시위와 관련해서는 사상 최대의 사법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언제고 촛불은 다시 일어설 기세로 잠복한 상태입니다.

동종업계 입장에서 말하기 민망합니다만 언론에서는 1980년대 유행하던 ‘해직 기자’라는 말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YTN·KBS 등 정부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미치는 언론기관은 하나같이 시끄럽습니다. YTN·KBS 기자들이 북한, 아니 전 정권의 사주를 받아 그런 것일까요. 헌법기관인 감사원에서는 내부적으로 ‘어쩌다 이 꼴이 됐는가’라는 공개적인 자조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대쪽’(이회창) ‘핏대’(전윤철)라는 전직 감사원장 별명이 말해주듯 공무원 중에서도 자존심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삼청동 ‘대감’이 민망한 모습으로 사과하는 작태가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남았습니다.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 일부 대학에서는 과거 부정과 비리로 물러난 사학재벌이 착착 복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 Weekly경향에서는 대학가에 슬금슬금 등장하는 과거 세력의 실상을 보십시오. 예상컨대, 내년 봄쯤에는 잠잠하던 이들 대학가가 또다시 학원 소요로 시끄러울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명령에 죽고 산다는 군대에서 상관의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항명입니까, 하극상입니까, 아니면 민주 군대라는 시대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군 지휘부 탓입니까. 무섭습니다.

불과 9개월 만에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히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까. 망치는 데 금메달을 딴 선수가 아니면 이렇게 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다 망가뜨리세요. 찾아보면 망가뜨릴 곳이 더 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망가져야 새로 세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비참한 백성입니다.

<원희복 편집장 wonhb@kyunghyang.com>

2008/11/04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