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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캡슐

정치사건 판사의 고뇌-이회창

■ 원희복 기자의 타임캡슐(55)

정치사건 판사의 고뇌-이회창

 


19962월 어느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에 있는 이마빌딩(이마빌딩은 요즘 인기 연속극 정도전의 집터였던 곳이다) 이회창 변호사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와 단 둘이 마주 앉았다이 변호사는 얼굴이 흰 데다 정치 초년병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 얼굴에 홍조를 띄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당시 모습인데 이마빌딩 사무실이 아니고, 구기동 자택 거실에서 모습이다. 당시 대쪽 판사로 통했던 이 변호사는 국무총리로 헌법에 명시된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제대로 보장하라고 김영삼 대통령(YS)에게 대들다 총리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도 법대로를 주장하다 총리직을 버린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기자와 만났을 때 이 변호사는 YS와 싸우고 총리직을 내던진 후 다시 YS와 독대, 막 정치에 뛰어든 상태였다. 기자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이라는 본인이 쓴 책을 이 변호사에게 줬다. 약간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 쥔 이 변호사는 어떤 인연으로 이 사람의 평전을 쓰게 됐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는 나름 책을 쓰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이 변호사는 한동안 허공을 보더니, “재판정에서 그의 잘생긴 얼굴과 표정을 보면서 사형을 선고하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35년여 판사 생활 중 가장 생각나고 아쉬운 재판이라고 회한을 밝혔다.


여기서 민족일보 사건이란 19615.16 군인 세력은 쿠테타를 감행하자마자 일간신문사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우리 언론사 최대의 필화사건을 말한다. 이회창 판사는 이 재판을 진행한 혁명재판소 1심 심판관으로 '조용수 사장 사형' 판결문에 서명했다.


이 변호사는 오판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완곡하게 잘못된 재판임은 인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판결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했다. 이 판사는 고시에 합격 후 첫 근무지로 인천지법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고 혁명재판소가 만들어지면서 판사 차출 지시가 내려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았다. 결국 연조가 낮은 판사부터 차출돼다 보니 자신이 포함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변호사의 한 측근 법조인은 당시 혁명재판소에 차출되지 않으려고 빼다가 위관급 군인에게 쪼인트(정강이)를 까인 판사도 있다고 귀뜸하기도 했다.(그만큼 이 변호사는 억지로 끌려가 판결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찌됐든 이회창 판사는 이후 승승장구, 대법관까지 올랐고 이른바 소수의견을 많이 내 대쪽판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감사원장 시절에는 군 최대 비리인 율곡비리를 감사하고, 국무총리로 대통령과 맞장을 떴다.


그런 그가 신한국당에 입당하자 지지부진하던 당의 지지율은 단숨에 올라갔다. 이회창 변호사는 선대위원장으로 4.11 총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들을 YS의 아들 김현철이 발굴했다고 해서 김현철 키드라고 불렀다. 이들이 바로 이회창 변호사를 비롯,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홍준표 경남지사, 김문수 경기지사 등이다.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이회창 변호사는 1997년 대선에서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1997년 봄 대선을 8개월 여 앞둔 시점에서 그의 지지율은 70%가 넘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정치입문 1년 반 만에 집권 여당 총재가 됐다.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것에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병역 기피와 함께 35년 전 자신이 내린 정치사건의 판결이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 최대 언론탄압의 주역이 폭로되고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에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패널이 바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이다. 당시 MBC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박원순 변호사는 이회창 후보에게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선고는 소급입법이며 위헌이라는 사실을 몰랐느냐고 질문했다. 이런 질문에 이 후보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당시)내가 위헌 여부를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결국 압도적 지지율을 기록하던 이 후보는 대선에서 낙선했다. 5년 후 이회창 변호사는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가 사형을 판결한 민족일보 사건의 저주는 계속 그를 괴롭혔다. 이 후보는 이 '민족일보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용수 사장 묘소를 찾아 사죄하려 했지만, 보수 측근의 만류로 성사되지 못했다.


2005215일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송석찬 의원은 이회창 총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언론말살 사건인 민족일보 사건의 담당 판사로서 반민주 악법의 칼날을 휘둘러...(장내 소란) 언론말살과 인권탄압이라며 이 총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이 총재는 분명하게 해명하지 못했다. 결국 이 후보의 대권 재수도 실패로 끝났다.


2008년 이 민족일보 사건도 재심을 통해 무죄로 밝혀지면서 이회창 판사의 판결은 오판임이 드러났다. 이회창 변호사가 두 번에 거친 대권재수에 실패한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가 내린 민족일보 사건 판결이 매우 큰 요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 1997년 대선이 끝난 후 이회창 후보 측의 한 인사는 기자에게 원희복 때문에 38만 표가 날아갔다고 말하기도 했다. 38만 표는 당시 김대중 당선자와 표차이다. 이는 기자가 이회창 판사의 민족일보 사건 판결 사실을 처음으로 폭로했기 때문이다.


판사는 자신이 내린 판결에 대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검증받아야 한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판결은 더욱 그렇다. 이번 통합진보당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김정운 판사 역시 그런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김 판사의 이번 판결은 유령처럼 평생, 아니 죽어서도 그의 주변을 맴돌 것이다김 판사가 대법관, 아니 정치에 뛰어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판사가 자연인으로 맘 편하게 살려면, 진실을 바탕으로 양심과 역사에 회한 없는 판결을 해야 한다. 비록 대법관까지 가는 영화를 누렸지만 말년에 쓸쓸한 회한을 토로했던 김갑수, 이회창 판사의 예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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