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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서울 2008년 겨울, 살아남는 법

2008년 11월 18일 밤 서울 한쪽 구석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올해 마흔네 살 된 노숙인이 공원에 있는 나무 벤치를 뜯어 불을 피우다 시민의 신고로 불구속 입건됐습니다. 라면 박스로는 기습 한파를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이 노숙인은 서울의 명문대 그것도 프라이드 강한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때 인테리어 사업을 하며 돈 잘 버는 젊은 사장으로 통했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아 5억 원의 빚을 졌다고 합니다. 그는 빚쟁이를 피해 집을 나와 고시원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공사장에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변변한 일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혼하면서 가정생활도 파탄이 났습니다. 그는 병든 몸에 기초생활 수급자로 전락해 정부가 주는 몇십만 원으로 근근히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보고 싶었습니다. 이혼한 아내가 키우는 딸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그는 딸집 가까운 공원에서 지난 8월부터 노숙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공원 벤치로 불을 피우다 전과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IMF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외환 관리를 잘못해 IMF를 야기한 그 장본인들은 7% 성장, 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이라는 ‘허황된’ 공약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년도 안 돼 또 우리 경제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경제위기는 10년 전 IMF 때보다 더 혹독할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문제는 외환 관리를 잘못한 우리나라만의 문제여서 회복하기 쉬웠는데 이제는 세계경제의 침체가 장기화하기 때문에 경제위기가 훨씬 오래갈 것이라는 겁니다. 이미 실업률·부도율·주가·환율 등 각종 경제지표는 사실상 제2의 IMF입니다. 집안의 기둥인 가장이 추운 거리로 나앉고 있습니다. IMF 때처럼 조만간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가정 해체도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교두보인 가정 해체를 막기 위한 최후의 안전판은 바로 사회안전망입니다.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 에서는 우리의 사회안전망을 꼼꼼히 따져봤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복지예산을 사실상 줄이고 있고 그나마 생색냈다는 것이 올해 안 쓴 예산을 돌려 쓴다는 것이더군요.

그래도 우리는 이 엄동설한에 살아남아야 합니다. 무능하다 못해 ‘파렴치한’ 정부가 마련한 대책이지만 일단 연탄 20장으로 엄동설한을 극복하십시오. 무료 급식권이라도 얻어 아이를 굶기지 마십시오. 자살? 안 됩니다. 살아남아 훗날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시오. 우울한 기획입니다만 이번 호 은 2008년 겨울 우리의 사회안전망을 점검하고 그 이용법을 알려드립니다.

<원희복 편집장 wonhb@kyunghyang.com>

2008/12/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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