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에 해당되는 글 22건

  1. 북한민주화운동가 김영환…영웅주의에 빠진 왜곡된 혁명가인가
  2.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고도의 계산된 좌충우돌식 행보
  3. 사진작가 이시우…피사체 본질 연구하는 평화운동가
  4. 국회의원 조경태, 소신있는 원조 친노 원칙주의자? 정치적 계산 분명한 현실주의자?
  5. 피고인석에 선 변호인 권영국 ‘노무현 스타일’ 닮은 거리의 변호사
  6. 최고령 공직자 ‘자니 윤’ 보은 인사의 ‘코미디’인가, 노령화 시대 ‘노익장’인가
  7. 딴지그룹 총수 김어준… 쫄지 않는 사업가인가, 마초주의 입담꾼인가
  8. ‘왕장관’ 최경환 경제부총리… 환란·공기업 부실 오욕, 경제살리기로 만회할까
  9. 이인호 KBS 이사장… 친일 할아버지 극복 못하고 양지만 좇은 변신의 처세가
  10.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40년- 함세웅 신부, 늘 약자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

그의 행보는 여전히 미스터리했다. 연락도 무슨 간첩 접선하듯 해야 했다. 사무실로 전화할 때마다 외국에 나가 있다고 했다. 연락처를 남겨두라고 했지만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나중에는 e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이쪽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e메일로 연락을 했지만 답장이 없다. 몇 가지 서면 질문지를 보냈지만 원고 마감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2주 동안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될 듯 말 듯’ 하다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김영환(51)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주사파를 이식한 이다. 그는 1991년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북한에서 미화 41만 달러를 받고 돌아와 지하혁명당을 만들어 남한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그러다 180도 생각을 바꿔 전향했다. 그는 지금 북한 민주화를 주장하며 북한에 삐라를 뿌리고, 북한의 붕괴를 추진하는 극우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중국에서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재판에 정부측 증인으로
50대 초반의 그는 매우 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지만 이렇게 180도 바뀐 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지난 10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신청에서 신청인 측(정부 측) 증인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지도했던’ 후배들에 대해 ▲통합진보당이 여전히 종북 혁명세력에 장악돼 있다 ▲이석기는 여전히 폭력혁명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이상규, 김미희 의원이 북의 자금을 받아 선거에 출마했다며 후배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법정 증언을 여러 번 번복했다. 그때마다 과거 증언이 ‘형식적 위증’이라고 항변했다. 또 출마자에게 돈은 줬지만 그 돈이 북한에서 온 것은 몰랐을 것이라는 등 일관성 없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증언은 나름 당당했지만 어떤 때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질문 상대와 의도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증언 도중 갈증을 느끼는지 물도 많이 마셨다.

그의 이번 헌재 증언에서 눈길을 끈 것은 국정원 프락치 논란이었다. 이날 피신청인 측 이재화 변호사는 “전향하려고 마음까지 먹고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하고 기관지에 14차례나 북한을 적극 찬양했다”면서 “순수하게 혁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함정을 파고 활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김영환은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활동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그런 일을 할 특별한 이유와 동기도 없다”고 강변했다.(상자기사 참조)

이 논란의 전후 배경은 이렇다. 그는 서울대 공법학과 82학번으로 독서모임 등을 통해 운동권에 몸 담았다. 1986년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1988년 출소한 그는 1991년 밀입북한다. 북한의 공작금을 받아 돌아온 그는 1992년 민혁당을 만들어 학생운동권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그의 주사파 이론은 학생운동권에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북한에 회의 가졌지만 지하당 조직?
하지만 그는 전향을 결심하고 1999년 국정원에 사상전향서를 제출, 이례적으로 공소보류 처분으로 풀려났다. 많은 후배들은 구속됐다.

문제는 그가 운동권에 회의를 느낀 시점이다. 그는 사상전향서에서 1991년 밀입북했을 때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을 둘러본 뒤 회의를 느꼈다고 썼다. 나중에는 이보다 앞선 80년대 말 동구권 몰락 때부터 운동권에 회의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가 북한 체제나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꼈다면 지하당을 창당하지 않거나, <강철서신> 제작을 중단하거나, 아예 운동권을 떠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의를 느꼈다면서도 지하당을 만들어 후배를 계속 끌어들였다. 그 후 본인과 몇몇만 전향하고 나머지 후배들은 처벌을 받게 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날 헌재 재판관도 김영환의 이런 행보에 의문을 제기하며 별도 질문을 했다. 통합진보당은 성명에서 “원래부터 국정원 협력자였던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해명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와 같이 서울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그는 건강을 위해 밥 한 숟갈을 40~50회 씹고 넘기고, 물도 씹어 먹는 매우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며 “이른바 <강철서신>은 김영환이 연필로 쓴 초안을 선배에게 회람을 받고, 다시 후배에게 돌려 검토한 내용을 일일이 지우개로 지운 후 다시 쓰는 치밀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감방 동료들은 “감방에서 바둑판 놓고 알까기를 이길 때까지 하자는 집요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2012년 7월 20일 중국 공안에 억류됐다 추방된 김영환씨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해 기자들에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그런 그가 자신이 몇 년 동안 벌여놓은 일을 하루아침에 접고 180도 돌아설 수 있을까. 사실 그가 1999년 8월 국정원에 출두해 조사를 받고 공소보류 판정을 받을 때에도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그는 당시 가장 진보적 잡지인 <말>지와 가장 보수적 잡지인 <월간조선> 두 극과 극의 매체를 ‘활용’하는 주도면밀한 수완을 보였다. 국정원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가 아니라는 엇갈린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극보수 정치인 정형근 의원은 “그는 2중간첩”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어째됐든 결과가 입증하지만 그는 나쁘게 말하면 ‘배신’한 것이고, 점잖게 말하면 ‘전향’했다. 배신을 하건, 전향을 하건 보통 사람이라면 과거 동지·후배에 책임감,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향을 입증하려는 듯 더욱 혹독하게 운동권 후배를 비난한다. 이에 대해 같이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이재화 변호사는 “보수건 진보건 인간은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김영환에겐 아무런 철학도 논리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고 혹평했다.

‘사상전향 세 가지 유형’의 복합형
우리 현대사에서 ‘전향’은 일제강점기 반일에서 친일로의 변신에서 비롯된다. 이후 분단상황에서 전향은 좌에서 우로의 변신을 의미했다. 진보운동가 이심산은 <한국의 사상전향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이라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심산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을 하다 해방 후 서울시경 사찰과에 특채돼 과거 동지 소탕에 앞장선 양한모 유형, 60년대 초 서울대 운동권의 리더였다가 후에 <조선일보>에서 극우논객이 된 류근일 유형, 그리고 70년대 서울대 운동권의 김문수가 보수정당에 들어간 유형 셋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과거 동지를 처단한 양한모 유형은 한국적 전향의 전범으로, 엘리트 집안의 류근일 유형은 봉건적 자유주의자 전향 유형으로 분류했다. 아예 과거를 외면한 김문수 유형은 몰락한 가정의 생계형 전향으로 평가했다. 김영환의 전향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포함될까. 김영환은 유복한 집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글로 자신의 과거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번처럼 과거 동지를 적극적으로 단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유형 모두에 해당된다.

<삼국지 인물전>을 쓴 작가 김재욱은 김영환에 대해 “머리는 좋은데, 자기 진영을 배반한 서촉 유장의 모사 장송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서촉의 장송은 주인 유장을 배반, 서촉지역의 지도를 들고 조조를 찾아갔다. 그런데 조조는 장송을 실컷 두들겨패고 쫓아냈다. 장송은 나중에 유비와 의기투합했지만 마지막은 비참했다.

이번 헌재 증언을 보면 김영환은 여전히 자신을 혁명가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독재정권 탄압에 시달리는 북한 민중을 자유롭게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와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한 인사는 “그는 군부정권과 싸웠다는 일종의 영웅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서 “지금 그는 강적인 북한과 맞붙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재화 변호사가 “북한 민주화는 북한 민중이 할 문제인데, 남한 문제에는 침묵하고 북한 문제만 거론하면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이 질문을 받은 김영환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국정원과 연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동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유신과 전두환 정부에 반감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민주화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해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했다.”

지난 10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김영환씨가 증언하고 있다. | 헌법재판소 영상캡처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삶도 바꾸겠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

지금 노동자·농민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장에서 일해봤는데, 당시 한 달 월급이 6만5000원이었다. 물론 그때 물가와 지금 물가가 차이가 있지만 6만5000원으로 정상적 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남한에서) 광범위한 비정규직 문제나 차별의 실상은 안 보이나.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과 다르다. 그때와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체사상의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주체사상은 극단주의가 아닌 사상·의지·용기·결단 등 인간의 주관적 요소를 중시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또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 식의 지나치게 냉소적·서구식 논리전개가 아닌 동양적 정서에 부합해 관심을 끌었다.”

(민혁당 활동 당시) 북한에 가 노동당에 가입하고 김일성을 만난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가 있나.
“(내가) 노동당 지도원임을 아는 사람은 하영옥, 박○○, 조○○, 김○○ 네 명이다.

1991년에 전향할 생각이었다면 1992년 민혁당을 창당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14회나 쓰고, 왜 그랬냐.
“사실 북한 방문 이전부터 1989년 하반기 베를린 장벽·동유럽 붕괴를 보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운동권에서 빠져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민혁당(주사파 전체)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체를 설득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민혁당 혁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함정을 파고 활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활동을 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할 특별한 이유와 동기도 없다. 민혁당 기관지 <빛>을 세심하게 읽어보고 분석한 사람은 알 것이다. 행간을 통해 변화된 사상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전향을 결심하고도 1998년까지 북한 지령을 따른 이유는.

“북한이 하영옥을 비롯한 다른 민혁당 간부와 접촉해 연결선을 갖게 되면 민혁당 위원들을 사상전환시키는 데 장애물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북한의 새로운 공작을 막기 위해 사상전환을 속이고, 민혁당 해체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민혁당에서 하영옥을 제외한 상층부 인사 대부분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밑에서 모르고 사회진보활동을 하던 후배만 처벌받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노동당에 가입했다가 처벌받은 사람이 40%다. 민혁당 평당원은 10%가 처벌됐고, RO(혁명) 조직원을 포함하면 2~3%밖에 처벌되지 않았다. 아이러니라고 보지 않는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하영옥을 통해 지방선거 500만원, 총선 1000만원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받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받았는지 알고 받았나.
“민혁당 조직원들은 중앙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북한에서 온 돈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나.
“알 수 없었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 사람들을 1999년 이후 만나 대화한 적이 있는가.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전해 들은 것은 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대화도 안 나누고, 활동도 안했는데 여전히 폭력혁명을 추종하고 있다고 믿는 근거는 뭐냐.

“간접적 접촉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전해 들었다. 공개 TV토론이나 세미나, 사적 서클 동문회 등에서 폭력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여전히 혁명가이며, 민중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는데 증인이 지금 추구하는 혁명은 도대체 뭐냐.

“북한 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에 탄압받고 시달리는 북한 민중을 구출하겠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은 별도 나라로 북한 민주화는 북한 민중이 할 문제이고, 진정한 혁명가는 남한 민주화에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르헨티나 사람이 쿠바혁명에 참여했듯이 우리 국민이라고 북한혁명을 하지 말라는 법은 혁명사에서 없다고 생각한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과거 군인이 득세하던 전두환 정권 시절 ‘국방위 회식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다. 1986년 3월 21일 저녁 서울의 한 요정에서 국회 국방위원과 고위장성이 함께 술을 마시다 난투극을 벌인 사건이다. 당시 실세 군인들이 여당 원내총무에게 “이새끼… 총무가 뭐 이렇게 늦게 오고 그래?”라며 힐난했다. 이를 지켜보던 기자 출신 남재희 의원이 맥주잔을 맞은편 벽에 던졌다. 맥주잔이 깨지면서 유리파편이 한 장성의 얼굴에 튀어 피가 흘렀다. 이에 군인들이 국회의원에게 발길질을 하며 두들겨 팼다. 이는 권력의 실세(군인)가 국회(의원)를 무시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11월 13일. 육군 중장 출신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국회 정무위원장실을 찾았다. 박 처장은 정우택 위원장에게 예산심사소위에서 보훈처 예산이 삭감된 것을 따지며 거세게 항의했다. 흥분한 박 처장은 정 위원장의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며 서류를 던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중앙부처 차관을 지낸 한 인사는 “차관급 부서장이 국회의원, 그것도 여당 상임위원장실에서 책상을 치고 서류를 내던지며 따지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4월 15일 국회 정무위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노래로 지정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정지윤기자


부서장이 국회의원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부서 운영에서 알파와 오메가인 법령과 예산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국정감사에서 ‘혈기 넘치는’ 국장급이 말도 안 되는 질의를 하는 국회의원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부서장이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과거 행정자치부 국감장에서 국회의원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던 모 국장은 인사조치됐고, 과장까지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당시 곤욕을 치른 그 과장은 지금 국회의원이 되어 당시 자신을 괴롭혔던 국회의원과 같은 당에 있다)

4번 국감 받으며 ‘국회파행 제조기’
박 처장의 이런 행동에 대해 김기준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분노조절장애 환자도 아니고 코미디 같은 행태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면서 “이쯤 되면 본인이 알아서 그만두는 게 도리”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 처장은 “공직은 국가가 부여한 것”이라며 “개인적으로 제 거취에 대해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박 처장은 ‘국회 파행 제조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있다. 박 처장은 국감을 네 번 받았는데 매번 돌출행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10월 10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상자기사 참조) 박근혜 정부에서 행정기관 수장이 문제가 된 경우는 여러 번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의 경우 직권면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처장의 돌출행동은 과거 윤 해양수산부 장관의 경우와 다르다. 윤 전 장관의 경우 ‘정말 몰라서’ 혹은 ‘천성적 성격’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박 처장의 행동은 그 속내를 알기 어렵다. 물론 박 처장의 이런 행동은 그가 권력의 ‘실세’라는 자신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 처장의 행동은 앞서 예를 든 전두환 정권 시절 국방위 회식사건과 유사하다.

업무성적 꼴찌 불구 정부 바뀌어도 연임
박 처장은 2011년 2월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된 후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에서도 연임, 2개 정부에서 신임을 받고 있는 최초의 유일한 장·차관급 기관장이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김병관 국방부 장관 내정자가 38일 만에 자진사퇴함에 따라 ‘어부지리’로 유임된 경우다. 감사원장이나 국민권익위원장, 국가인권위원장은 모두 임기가 있다. 따라서 명실상부 2개 정권에서 유임된 정무직 기관장은 그가 최초이자 유일하다. 업무능력이 워낙 뛰어나서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가 재임하는 보훈처는 정부업무평가에서 거의 꼴찌를 맴돌았다. 국무총리실에서는 정부업무평가위원회를 두고 매년 장·차관급 부처의 주요 역점 시책을 평가한다. 전문가를 동원해 최우수-우수-보통-미흡 4단계로 이뤄지는 이 평가는 공식적인 부처 평가로 사실상 부서장의 업무성적표이다. 상금도 푸짐하다.

지난 10월 10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논란 끝에 겨우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박 처장이 부임한 2011년 정부업무평가를 보면 보훈처는 전체 기준 ‘보통’의 평가를 받았고, 특히 정책관리역량 부분에선 방위사업청과 함께 꼴찌인 ‘미흡’ 판정을 받았다. 2012년도 마찬가지다. 보훈처는 전체적으로 국세청 등과 함께 ‘보통’ 평가를 받았지만, 정책관리역량 부분에서 문화재청, 법제처와 함께 ‘미흡’ 판정을 받았다. 차관급 기관으로 연속 꼴찌인 ‘미흡’ 판정을 받은 기관은 오직 보훈처뿐이다. 그의 재임 기간 보훈처 업무성적표는 전체 장·차관급 정부기관 중 사실상 꼴찌였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박 처장의 보훈처는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박 처장은 부임하자마자 국가유공자 서훈을 결정하는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진보적 성향의 역사학자를 대거 교체해 학계의 반발을 샀다. 결국 장대섭 보훈심사위원장이 그의 독단적인 조직 운영에 반발하며 “(박 처장은) 독립유공자들의 독립정신과 민주정신은 배제하고 안보교육에만 치중하고 있다”면서 “어떻게 반공과 대결만 강조하는 냉전적인 역사인식으로 평화와 통일이 화두인 21세기의 보훈처를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11년 8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을 국회에서 부인하다가 나중에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됐다. 국회는 그를 위증혐의로 고발하려 했지만, 임기가 끝나면서 유야무야됐다. 또 자신이 설립한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에 보훈처 안보 강의를 몰아줬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 단체의 안보 강연에는 “촛불시위대는 종북세력이며, 전 민주당 대표의 ‘국민의 명령 백만 민란운동’은 간첩세력”이라는 내용이 있다.

전역 직후 한나라당에 입당 정치권으로

전문가에 의한 객관적인 정부업무평가에서 거의 꼴찌 판정을 받고, 이렇게 사회적인 문제를 계속 야기한 기관장이 연임됐다면 그것은 특별한 업무외 능력 때문일 것이다. 시사평론가 박상병씨는 박 처장에 대해 “믿는 구석이 있으면 겁나는 것이 없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측근인사로 분류가 되다 보니까 장관이든, 국민이든, 국회든 겁나는 게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믿는 그것은 뭘까. 그는 스스로 “강릉상고를 나와 학연도 지연도 없이 육군 중장까지 승진하는 동안 누구에게 부탁도, 로비도 해본 적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행동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럴까. 박 처장은 차관급 기관장에 어울리지 않게 정치적 행보를 많이 걸었다. 박 처장은 전역 직후인 2005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7년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하는 등 일찌감치 정치판에 몸을 담았다.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하는 등 정치판의 쓴맛도 봤다. 무엇보다 박 처장은 체험적으로 ‘상대’(임명권자)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전투정보과장, 군사정보부장, 합참 정보본부장 등 군생활 대부분을 정보분야에서 일했다. 군대에서 정보란 적(상대)의 의도를 알아내는 업무다. 철저히 상대 입장에서 객관화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고위공무원에게 매우 중요한 임명권자의 의지를 알아내는 능력은 정보업무와 상통한다. 박 처장이 최하위권 업무평가와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연임할 수 있었던 노하우는 이것 덕분일 것이다.

2013년 9월 야당 국회의원들이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대선개입 의혹 발언이 담긴 동영상을 보고 있다. | 박민규기자


노골적인 안보교육으로 사실상 대선개입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계속하는 나라사랑 교육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찬양하고 반유신 세력을 종북좌파로 폄하한 동영상을 배포한 일, 여야 의원 158명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라는 결의를 무시하는 돌출행위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연임 근거인 것이다.

박 처장은 유임 발표 당시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2년 동안 젊은이들이 균형 있는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는 나라사랑 교육에 역점을 뒀는데 그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본인 스스로 이런 정치적 행보가 자신의 유임 근거임을 고백한 대목이다. 그가 이번 국정감사장에서 TV로 중계되는 나라사랑 교육 업무보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따라서 지금 박 처장의 좌충우돌적으로 보이는 행보는 고도의 계산된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김기식 의원(새정치연합)도 “국감장을 개인적인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삼겠다는 매우 의도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국정감사장 돌출행동, 국회의원들과 ‘설전’

10월 10일 오전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 국가보훈처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부처 업무보고는 유인물로 대체하고 인사말과 간부 소개가 끝나면 곧장 질의에 들어가기로 여야가 합의한 상태였다. 이에 박승춘 보훈처장이 이의를 제기했다.

박승춘 처장 다른 부서는 모르겠지만, 보훈처 업무는 첨예하고 논란이 됐기 때문에 충분히 설명해 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보훈처 업무는 보고해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우택 위원장 보훈처장께서 강한 애국심을 갖고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여야에서 합의했기 때문에 원만한 운영을 위해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인사말씀과 간부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박 처장 위원장님 말씀, 인식합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업무, 나라사랑 업무는 국가안위와 관련된 문제고, 특히 국민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 국정감사를 TV를 통해 보고 있기 때문에….(소리 지르는 의원 있음)

정 위원장 아니, 증인! 위원회 운영은 여야가 합의한 것인데… 위원장으로서 좋은 말씀으로 권고하니 수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박 처장 (한참을 서서 생각하더니) 위원장님, 저는 업무보고를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이때 국회사무처 직원이 정우택 위원장에게 규정집을 가져다 준다)

정 위원장 이거 국회법 120조를 보면 증인 발언은 위원장 허가를 얻도록 돼 있습니다. 더 하면 위원들로부터 좋지 않아요. 오케이?

박 처장 제 말씀 좀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정부기관의 장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국정감사 4회째 받고 있습니다. 질의응답만 하면 정부 입장을 충분히 개진할 수 없어, 세금 내는 국민의 입장에서….

정 위원장 (큰 목소리로) 저- 처장! 처장! 여기 지금 국회 설득하러 왔어요, 지금? 여기 국회의원에게 설득하러 왔어요?

박 처장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 위원장 위원장이 발언 안 준다는데 왜 자꾸 그래요?

박 처장 저는 당위성을 말하는 겁니다.

정 위원장 참나 …(한숨을 쉬며) 인사말씀과 간부 소개 생략하겠습니다. 자리에 가서 앉으시기 바랍니다. 자리 가서 앉으세요. 국정감사하면서 피감기관에서 저렇게 얘기하는 분 첨봤다. 처장, 처음부터 이러면 회의가 진행되겠습니까.

박 처장 저는 다른 상임위도 마찬가지로….

정 위원장 (서류를 집어 던지려다 말고) 위원들이 업무보고 안 받겠다는데 왜 그래요? 하휴 참.

김용태 의원(새누리당) 저도 황당한 상황인데, 정부 입장표명엔 방식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정부 입장을 피력하시려면 국정감사 자리 아닌 공식적인 기자회견 자리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박병석 의원(새정치민주연합) 국정감사의 본래 목적은 행정부가 1년 동안 해온 것에 대해 국회가 평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국회 네 번 들어와 이런 경우 처음 겪는 일입니다. 보훈처장께서는 국민의 세금을 쓰는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도리와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 보훈처장이 보여주는 태도는 피감기관으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이 국정감사장을 개인적인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에게 보여주는 국감을 하겠다는 매우 의도된, 국회에 대한 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국감장을 정치적 장으로 본인이 만들어 가려는 의도이고, 국회에 대한 능멸이고 도전입니다. 이건 여야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태환(새누리당) 보훈처장, 이렇게 하시죠. 일단 간부 소개하시고 질의 순서에 들어가 의견이 있으면 하면 되지 이렇게 시작도 못하게 하면 얘기가 안 되는 겁니다. 사과하시고 빨리 하세요.

정 위원장 이 자리는 국정감사 자리입니다. 국가보훈처는 피감기관입니다. 인사말씀과 함께 간부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박 처장 국가보훈처장입니다….(인사말을 형식적으로 빠르게 줄줄 읽고 간부 소개를 마침)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뛰어난 사진 한 컷이 10개 기사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사진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실제 로버트 카파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쓰러지는 병사’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걸작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신 사진 보도가 4·19혁명을 촉발시켰다.

사진은 보통 그 자체로 말한다. 그런데 한 장의 사진을 보완·설명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텍스트(문서)를 검증하고 첨부하는 독특한 사진작가가 있다. 인천시 강화에서 살고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1967년생)가 바로 그다. 그는 평화운동가라는 소리를 듣고, 심지어 국제정치학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가 지난해 쓴 844쪽의 <유엔군사령부>(들녘)는 66쪽에 이르는 참고문헌과 1763개의 각주가 달린 방대한 학술서로 주목을 받았다. 유엔군사령부와 관련해 유엔의 활동과 국제법의 원전을 추적했으며, 우리 헌법까지 조밀하게 따졌다. 실제 이 책 출판기념회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 2개가 녹아 있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는 방대한 각주
사진작가가 예술 쪽 책을 낸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국제정치 전문서적을 낸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다고 그가 쓴 책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그가 쓴 <민통선 평화기행> (창비)은 한국을 대표하는 100권의 책에 뽑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2004)에 출품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받았다. 그의 최종 학력은 전문대 사진과 1학년 중퇴다.

그는 이번에 제주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여행한 기행문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도서출판 말)을 펴냈다. 앞서 <민통선 평화기행>의 2탄격이다. 이 책 역시 사진을 담은 기행문이지만 1000개가 넘는 각주를 달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오키나와 유엔군사령부 문제는 물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MD(미사일방어체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강화를 떠나 비무장지대를 걸어 부산까지 내려간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까지 두 달간을 걸으며, 사색하고 또 사색했다. 이 유엔사 해체를 위한 걷기 명상은 나에게 한국과 일본, 제주와 오키나와를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손바닥만한 구형 ‘똑딱이’로 찍는 작가
이시우는 사진 촬영 전 피사체의 본질에 대해 ‘처절하게’ 연구하는 독특한 사진작가다. 책은 그 결과물인 셈이다.

이번에 출간한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공간적으로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서부터 멀리 오키나와에서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는 헤노코 농성장을 넘나드는 기행문이다. 여기에 고려 삼별초에서부터 오키나와 우라소에 성, 그리고 1920년대 고려공산당원과 비슷한 시기 일본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 일본공산당 당수를 연결하는 시간적 기행도 함께한다.

그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앞서 낸 <유엔군사령부>와 일면 같은 맥락이다. 제주나 오키나와 모두 각각의 섬 문제가 아닌 미국의 반공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비롯된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주 4·3을 남한의 내부 문제로만 봤다”면서 “서북청년단 뒤에는 이승만의 반공주의, 즉 세계적 반공주의 의제가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시우는 충남 예산이 고향으로 시골에서 중학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 1987년 신구전문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렵게 농사를 짓던 아버님이 무리를 하며 비싼 카메라를 사주신 것을 지금도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그는 사진 공부보다 시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6·10항쟁이 내 운명을 바꿨고, 내 삶도 바꿨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공사로 파괴된 제주 강정마을 구렁비 바위 해안.(사진 위)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오키나와 헤노코 농성장. | 이시우 사진


그는 사진을 찍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88년 청계피복노조원 사진반에서 사진을 가르치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자신의 과거에 관한 사진을 찍어보라고 했는데 한 노동자가 콘크리트 벽에 대못이 박힌 사진을 찍어 왔다. 왜 이런 사진을 찍었느냐고 물으니 과거 구두닦이 시절, 구두통을 못에 걸어놓는 조건으로 왕초에게 상납했다는 것이다. 그 노동자는 당시 어린 마음에 이 못값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못 하나에 이렇게 충격적인 사연을 상징화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 내 사진의 흐름이 바뀌었다.”

지뢰·철조망 찍어 표현하는 주제는 평화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그는 1992년 대선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사진을 시작했다. 그는 “똑딱이 카메라로 나만의 사진을 찍을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사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작가이지만, 손바닥만한 구형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로 모든 작품을 찍는다. 그는 똑딱이 카메라 하나 들고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을 누볐다. 그의 피사체는 지뢰로 다리를 잃은 농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주민 등이다. 이렇게 찍은 작품은 1999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로 발표되고, 몇 차례 국제전에 초대됐다.

그가 비무장지대 지뢰 사진을 찍다가 고민한 것이 바로 유엔군사령부의 존재였다. 그는 공부 끝에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사참모위원회가 아닌 미 합참의 지휘를 받는 미군”이라며 “유엔사의 존재는 유엔 결의도 어기고, 또 우리 헌법에도 위배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2007년 그는 이런 주장을 폈다가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경찰의 무단 체포에 항의해 무려 48일간 단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재판을 하면서 유엔사 해체는 ‘한 사진작가의 어설픈 주장’이라는 검찰 측 증언을 반박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이 공부의 결과물이 바로 <유엔군사령부>이고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이다. 결국 그는 치열한 재판 끝에 5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국내는 물론 네델란드·독일·미국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국내 유명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그러는 사이 박종철인권상(2007), 사월혁명상(2008), 늦봄통일상(2010)도 받았다. 사진작가이면서 평화운동가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그의 본업은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주제는 평화다. ‘평화’ 하면 비둘기나 잔잔한 호수, 아름다운 꽃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지뢰나 철조망, 미군 장갑차 등이 등장한다. 불편하고,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것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평화는 지뢰 뒤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중심은 심장이나 머리가 아니라 가장 아픈 곳이다. 우리의 시선을 바로 그 아픈 곳으로 이끄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말했다.



“어떤 예술적 이미지도 세상의 진리 담고 있어야”

이번에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낸 의도는 무엇인가.
“지난번 <유엔군사령부>에서의 고민을 이어서 쓴 것이다.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미국의 문제이면서 유엔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주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고민한 것이 바로 이번 책이다. 비슷한 운명의 제주와 오키나와에 대해 단순한 공간뿐만 아니라 역사를 넘나들며 쓴 것이다.”

이번 책에도 각주가 많다. 그 참고문헌을 다 찾아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논문식 원고를 기행문으로 바꿨는데도 각주가 많이 남았다. 국회도서관과 서초동 중앙도서관에 대부분 자료가 있다.”

방대한 국제관계 영문자료를 섭렵할 정도로 실력이 되는가.
“떠듬떠듬 볼 줄은 안다.”(허허)

제주 4·3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주 4·3은 당시 위정자가 서북청년단을 이용해 자행한 것 아닌가. 최근 그런 서북청년단을 계승하겠다는 단체가 나왔다.
“하휴~,(한숨) 글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제주 4·3을 남로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책도 마구 만들고 있다. 사실 이번 책을 쓰면서 민주진영에서도 제주 4·3을 보는 시각을 전향적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주 4·3은 당시에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는 국가가 없어 내란이라고 할 수 없고, 당시 남로당은 합법적 정당이었다. 뭘 보더라도 4·3은 반란이나 폭동이 아니다.”

사진작가인데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어떤 카메라인가.
“보여드릴까.(그가 꺼낸 사진기는 손바닥만한 ‘캐논 IXUS105’로 단종되고, 몇 번이나 수리를 했다고 한다) 작품사진 다 이걸로 찍는다.”

요즘에는 사진 동호회 아주머니도 굉장히 좋은 카메라 가지고 다닌다.
“사진을 공부해 보니 과거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쓴 카메라는 이 똑딱이 카메라 성능에도 미치지 못했다. 가로세로 1m 정도까지 작품을 출력하는 데 아무 문제없다.”

이 똑딱이 카메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나.
“물론 그렇다. 모든 것을 모두 잘 찍는 카메라는 없다. 작가는 찍는 소재에 따라 카메라를 고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나 스포츠 사진 작가는 굉장히 큰 렌즈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겁기만 하다. 나도 오산 미군기지 탄약고를 찍기 위해서 국내에서 제일 큰 망원렌즈를 빌려 사용했다. 그런 경우 아니면 보통 이 카메라로 충분하다.”

사진을 잘 찍는 비결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셔터를 누를 때 자기는 처음 찍는 사진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자기에게 입력된 이미지를 반복적·관성적으로 누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을 많이 찍지만 그 사진이 그 사진인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찍기 위해선 피사체에 대한 연구,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기에 투자하는 것보다 피사체 공부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이미지가 찾아질 수 있다.”

작품은 좀 팔리는가.

“사진작가 치고 조금 팔리는 작가 축에 든다.”(허허)

사진으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우리나라에서 사진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안 된다는 의미)

사진작가와 저술가, 무엇이 주업인가.

“사진작가다. 책은 사진 작업의 결과물이다. 사진을 위한 글이다. 내 기준으로 사진은 충분한 이론적 준비, 실천을 통한 검증이 동반돼야 새로운 미학적 이미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한 장의 천재적인 사진으로 결론을 내는데, 나는 아니다. 어떤 예술적 이미지도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어야 예술이 산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름답고, 독특하고, 새로운 것만으로 평가받는 예술은 오래 못 간다.”

한 장의 이미지로 승부를 내는 것보다 각주가 1700개가 넘는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런 작업 아닐까.

“그것도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텍스트는 훈련으로 논리적 입증을 하면 되는데, 사진가는 그것을 뛰어넘어 이미지까지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건방진 말인지 모르지만 예술적 사유가 학문적 사유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얼마 전 세월호 유족 대표와 대리운전기사 폭행사건이 터지자 새정치민주연합 조경태 의원이 같은 당 김현 의원에 대해 “출당조치를 통해서라도 당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도리”라고 주장했다. 김현 의원이 폭행 현장에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에서는 “참으로 일리 있고 가슴에 와 닿는 옳은 말씀”이라며 환호했다. 이에 새정치연합 정청래 의원은 “사사건건 새누리당의 정신적 당원처럼 활동하면서 탈당, 분당 운운하는 조경태 의원을 당 지도부는 출당 제명시켜라”고 요구했다.

당론과 어긋나는 튀는 발언 눈길
조 의원은 야당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다. 당론과 어긋나는 발언을 자주해 여당 의원으로 착각할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 필패론을 주장했고, 대선 직후 NLL(북방한계선) 논란에서도 오히려 문재인 의원을 비난했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특별검사 도입에도 반대하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경찰 수사 축소·은폐의혹을 받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무죄 판결도 존중해야 된다고 말했다.


당론과 달리 개성공단 폐쇄에 대한 정부의 강경조치를 옹호하고, 시국선언을 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인, 심지어 수구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다.

언론은 튀는 그의 발언에 주목했고,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가 유독 비난하는 대상은 지난 3월 신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분명히 선을 그었던 “종북친노는 신당에 참여하지 말라”는 발언에 응축돼 있다. ‘종북친노’라는 표현은 종북세력과 친노세력을 각각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친노세력은 곧 종북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애매하다. 같은 당 최민희 의원이 발끈하며 “친노가 종북인지 종북이 친노인지 분명히 말하라”면서 “무엇이 종북이고, 무엇이 친노인지 공개토론하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는 친노세력과 종북세력을 주로 비난한다. 종북이라는 용어에 대해 앞서 최민희 의원은 “아무런 개념규정 없이 일부 보수세력이 쳐놓은 야권분열 프레임”이라고 비난했다. 실제 진보세력을 종북으로 표현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는 판결도 나왔다.

조 의원은 당내에서 좋게 말하면 ‘입바른 소리’ 잘하는 의원으로 평가받지만, ‘정신적 새누리당’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그는 이 같은 ‘소신행보’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이유 중에는 자신이야말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원조 친노이며,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입바른 소리’ VS ‘노이즈 마케팅’
원조 친노라는 그의 주장은 상당 부분 맞다.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약관 28세에 YS(김영삼)의 3당 합당을 거부한 ‘꼬마 민주당’으로 노무현 당시 의원과 함께 부산에서 출마했다. 출마하려는 사람이 없었으니 공천 받기는 쉬웠다. 비록 낙선했지만 1만여표를 얻었다. 그리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여당으로 그나마 중앙당 지원이 많았다. 하지만 이른바 ‘김대중 당’ 이미지로 부산에서 당선되긴 어려웠다. 이때 같이 출마한 노무현 후보도 낙선했다.

하지만 절치부심, 2004년 17대 총선에서 극적으로 당선됐다. 이른바 탄핵정국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분위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표를 갈랐기 때문이다. 그가 3수 끝에 부산에서 당선되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로 불러 “조경태 학습관을 세워야 한다”고 격려할 정도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내리 3선을 이뤄냈다.

게다가 그는 누구처럼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편법’을 쓰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은 영남(대구)에서 무소속으로 ‘탈색’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역시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자치부(현 안전행정부) 장관까지 지낸 김두관도 무소속 ‘탈색’ 끝에 경남지사에 당선됐다. 하지만 장관 한 번 못한 조 의원은 정당 탈색 없이 부산에서 당당하게 당선됐고, 3선을 거쳤다. 친노 대표주자인 유시민·김두관보다 훨씬 명분과 성과에서 앞선다. 게다가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대권주자인 문재인 후보보다 많은 득표율을 올렸다.

야당에 척박한 부산에서 그가 이룬 3선의 저력을 부정할 순 없다. 게다가 그는 무명의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며 특히 2002년 노무현 후보 사퇴 요구가 빗발칠 때 이를 온몸으로 막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일등공신이라고 평가해도 과하지 않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은 노무현과 대등하게 정치를 한 인물’이며, 문재인 의원 같은 노무현의 참모들과 ‘노는 차원이 달랐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자수성가’ 부산에서 3선 저력
이렇게 (정치적) 자수성가를 한 사람들의 특징이 조 의원에게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의식이다. 정신과 정신혜 박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 말을 분석하면서 “자신이 겪은 가난의 본질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공감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말에 남을 배려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조경태 의원이 부산에서 출마했을 당시 포스터.(왼쪽) 오른쪽은 지난 3월 <경향신문> 김용민 만평이다.


정신혜 박사의 이 분석은 조 의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남에서 3선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에는 ‘나보다 더 힘든 과정을 겪고 당선된 사람 나오라 그래’라는 말이고, 결국 자기 과신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는 없다는 말과 같다. 정 박사는 이런 사람일수록 ‘통제 불가능의 자신감’을 가진다고 분석했다.

그가 친노세력을 맹렬히 비난하는 것도 이런 통제할 수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문재인 의원을 ‘필패 카드’라고 비판했고, 대선 이후에도 집요하게 그를 ‘씹고’ 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틈만 나면 문재인 의원을 비판했다.(상자기사 참조) 그가 친노를 비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패권주의에 빠져 있고, 과격한 장외투쟁을 앞세우며, 특히 진보를 넘어 종북적이라는 것이다.

진보주의자가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전북대 강준만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일면 숙명적이다.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똑같은 도덕적 가치를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역 없는 비판은 가치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 원칙주의자들의 ‘필요악’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 의원은 진보주의자가 아니고 매우 보수, 심지어 수구적이기까지 하다.(본인도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은 아무 쓸모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노무현 정신과 많이 어긋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조 의원의 친노 비판을 “부산지역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놓고 벌이는 이해싸움”으로 평가 절하한다. 지방선거 등에서 측근들의 공천 탈락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과 특히 부산을 장악한 친노들이 3선 의원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정치적 계산이 분명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친노 측은 그를 ‘배신자’로 평가한다. 노무현 후원회장을 지낸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은 조 의원을 삼국지의 ‘위연’에 비유한다. 위연은 제갈공명의 총애를 받는 장수였으나 그가 죽자 배신을 한다. 이기명 위원장은 조 의원에게 “정치적 계산이라면 최하수의 계산이요, 출세전략이라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라며 “계산도 좋고 출세도 좋지만 최소한 인간 노릇은 해야 할 게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나처럼 맨땅에서 정치한 사람 어디 있나”


인터뷰는 초반부터 신경전으로 시작됐다. 기자가 조경태 의원을 인터뷰하려는 이유로 ‘튀기 때문에 탐구대상으로 하고 싶어서다’라고 말을 꺼냈다. 이에 조 의원은 “3선 의원에게 튄다는 발언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좀 돋보인다라는 표현은 어떨까”라고 제동을 걸었다.

당 해체론을 주장했는데 어떤 당을 만들자는 것인가.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은 안 된다. 당이 매우 반민주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다. 6·4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은 모두 경선했는데 우리는 의원 맘대로 1번, 2번을 줬다. 새누리당보다 훨씬 투명하지 못했다.”

특정 집단이란 친노세력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친노 강경·패권주의자들을 말한다. 사실 내가 원조 친노다. 노무현 대통령은 평소 ‘나에게 엄격하고 상대방에게 관대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친노는 자기 계파에게 관대하고 상대에게 엄격하다. 가짜 친노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지 않고 이름만 팔아먹는 매노세력이다.”

정청래 의원은 조 의원의 이런 행보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 나는 그분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한 번도 뭐라 한 적 없다. 정청래 의원 개인에 대해서 탓하고 싶은 생각 없다.”

당내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큼 정부나 새누리당을 비판하지 않으니 그런 것 아닌가.
“내가 정부에서 추진한 원전정책을 반대하는 데 선봉에 선 사람이다. 정부의 에볼라 바이러스 대책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스스로 썩어 있는데 남에게 잘하라고 하는 게 설득력이 있는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말자는 것이다.”

조 의원의 해당행위성 발언은 지역구 당선을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지적이 있다.
“(나) 3선 했다. 해당행위를 누가 하나? 당의 지지율을 누가 떨어뜨렸나. 당에서 책임진 사람들이 잘했으면 당의 지지율이 이렇게 (새누리당의) 반토막으로 떨어지나. 문재인 의원의 NLL(북방한계선) 발언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렸나.”

NLL 발언사태에서 정상회담 회의록을 선거에 악용한 것이 더 문제 아닌가.

“(이 부분에서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이용을 왜 당하나. 왜 돌아가신 대통령 기록물을 공개하자고 하나, 그리고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책임 안 졌다. 그때 얼마나 국민적 신뢰를 잃었나. 기초의원 공천 폐지도 (문재인) 후보 시절 본인이 약속했다. 아닌가? 그것도 뒤집었다.”

그것도 여당이 공약했는데, 여당이 먼저 공약을 뒤집은 것 아닌가.

“자,(손사래를 치면서) 그러면 상대가 나쁜 짓 한다고 똑같이 나쁜 짓 해야 하나. 그러면 똑같은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원칙주의자다, 원칙주의자. 내가 얘기한 것 가운데 틀린 것 있으면 얘기해 달라. 그리고 이석기 의원 문제도 당은 어떻게 처리했나.”

국회의원이 소신껏 투표를 했는데 커밍아웃 하라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커밍아웃이라는 표현은 옛날 유시민 의원이 처음 썼다. 내가 얘기하는 커밍아웃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 밝히는 것이고, 싫으면 안 밝혀도 되고…. 실제 그분들이 안 밝혔다. 자기가 표결한 부분에 대해 책임을 져라, 그런 얘기다.”

그렇게 여론재판을 했지만 결국 이석기 의원 사건에 대해 내란음모 실체가 없다고 판결나지 않았나.
“어쨌든간에 국가보안법, 실정법 위반 아닌가.”

국가보안법은 노무현 대통령도, 과거 열린우리당도 당론으로 폐지하려 한 법이다.
“얼마 전 김영환씨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에 나와 진술하지 않았나. 통합진보당 의원들 간첩이라고,”

그걸 100% 믿는가. 지금 검찰과 국정원 발표를 다 믿나.
“아이,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데, 국민들이 통진당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학생운동 할 때(전두환·노태우 시절) 많은 학생들이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 학생운동은 그것을 반대한 것 아닌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독재시대와는….”

얼마 전 국가정보원이 간첩을 조작하려 한 게 드러났다. 그때와 뭐가 다른가.
“지금은 (간첩조작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가. 아무튼 그때와 다르다.”

혹시 새누리당에서 영입 제안이 오면 가겠는가.
“경상도에서 민주당(새정치연합) 활동은 독립운동 하는 것과 같다. 내가 빨갱이 소리 들으며 20년 정치했다. 조경태처럼 맨땅에서 인동초처럼 정치한 사람 어디 있나. 내가 부산에서 득표율이 58.2%다. 문재인 후보보다 많이 받았다. 연임하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 참, 나의 진정성을 너무 모른다. 조경태 인물탐구 정말 제대로 해달라.”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지난 10월 20일 서울중앙지법 제29형사부(재판장 윤승은 부장판사) 법정. 보통 4~5명에 불과한 변호인석이 이날따라 변호사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일부 변호사는 서 있고, 그것도 모자라 방청석에까지 변호사들로 넘쳐났다. 이날 법정에 나온 변호사는 모두 38명, 공동변호인 선임계를 낸 변호인은 모두 85명이었다.(공동변호인 선임계는 계속 늘어 29일 현재 100명이 넘었다)

피고인석에는 흰머리에 다소 왜소한 한 남자가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집시법 위반, 교통방해죄 등으로 기소된 권영국 피고인(변호사)이었다.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부림사건으로 기소된 노무현 변호사를 변론하기 위해 나온 99명의 공동변호인단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이뤘다.

권영국 변호사는 민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 위원장직도 맡고 있다. 지난 29일 저녁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 이상훈 선임기자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 당해 법정에
변호인 측은 영화처럼 공동변호인 이름을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이유로 거절해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재연되지 못했다. 이날 권영국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집회의 일차적인 목적은 바로 경찰력의 남용으로 인해 집회금지 장소가 되어버린 화단 옆과 앞의 장소도 집회의 자유가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의 자유로운 공간임을 확인하고 이를 시민들과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경찰과 물리적 충돌 여부를 따지는 협소한 송사가 아니라 국가가 공공복리와 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을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기준을 세우는 재판이 되길 바랍니다.”

이 재판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해 4월 서울 중구청이 대한문 앞 인도에 설치된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와 농성장을 기습적으로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단을 만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인도에 화단을 설치한 것이나, 문화재청 허가 없이 문화재(덕수궁) 인근에서 공사를 벌인 것도 불법이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화단 설치를 집회 방해행위로 인정하고 긴급구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쌍용차대책위가 이 화단 앞에서 집회를 열자 집회 허가지역이 아니라며 집시법 위반죄를, 이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해 연행했다. 연행자들에게 헌법에 보장된 변호인 접견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던 권 변호사마저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했다.(검찰은 지난 10월 30일 이 과정에서 4명의 민변 변호사를 추가로 기소했다)

대학 때 노동야학 참여한 주변운동권
시국사건과 관련해 변호인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면서 또 시사적이다. 1970년대 유신 시절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에서 학생을 변론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정구속된 전례가 있고, 1987년 노무현·이상수 변호사가 노조활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노동법 3자개입 금지 위반으로 사법처리된 사례가 있다. 이후 시국사건과 관련해 변호인을 사법처리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변호사를 사법처리하기 어려운 이유는 워낙 변호사가 법에 ‘빠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변호사를 사법처리하는 것은 인권 후진국임을 방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2009년 쌍용차 평택공장 앞 시위현장에서 비슷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도 권 변호사에게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영장이 발부됐고, 권 변호사는 불법연행에 항의해 전경 중대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맞고소했다. 재판 결과 1·2심에서 권 변호사는 모두 무죄, 전경 중대장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6개월, 자격정지 1년이 나왔다. 최종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지만, 전경 중대장의 유죄가 확정되면 직업경찰인 중대장은 공무원 신분을 잃는다. 그만큼 변호사의 사법처리는 어렵고, 그런 면에서 권 변호사는 경찰에게 골치 아픈 존재로 기피대상 1호이다.

권 변호사는 ‘거리의 변호사’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법정이나 사무실보다 시위 현장, 철야농성 현장에 더 얼굴이 알려져 있다. 그는 “악다구니를 써야 하고 몸싸움도 해야 하는 현장은 사실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변호사의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면서 “하지만 현장은 우리의 인권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위를 하다 노동자·시민들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보장받기 어려웠던 변호인 접견권을 정착시켰다. 이것은 ‘지켜지지 않은 매우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이었다.

2013년 11월 28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열린 노동자 촛불문화제에 권영국 변호사가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권 변호사는 1963년생이다. 집이 가난해 동생 공부시키기 위해 포철공고에 진학했다. 포철공고는 포항제철 취업이 가능해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이 진학했다. 제철과에서 쇳물을 다루는 공부를 하다 대학에 가고 싶어 진학반에 들어가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합격했다. 그는 공대생이었지만 곧바로 사회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운동권 언더서클에 들어갈 배포도 없던 주류 핵심운동권이 아니었다”면서 “노동야학에 참여한 주변 운동권이었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풍산금속에 취업해서 노조를 만들려다가 발각돼 인사조치됐다. 1988년 회사 공장 폭발사고로 직원이 숨지자, 이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이다 결국 해고됐다. 전국해고자복직위원회 선전국장이라는 이력은 그래서 있다. 그는 복직투쟁 과정에서 수배-구속-복역을 반복하며 4년을 보냈다. ‘지독히 처절한 노동투쟁’ 기간이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 고민스러운 기간이었다. 장사를 할까 고민하다 공부를 해보라는 아내의 권유로 뒤늦게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만에 합격했다.

작업복 익숙한 변호사 자격 가진 노동자
2001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오라는 제안을 마다하고 민주노총에 법률원을 만들어 초대 원장을 맡았다. 그때까지 법을 모르고 강행하는 쟁의행위는 백이면 백 노조가 질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도 법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연 것이다. 그는 민주노총 법률원장으로 민주노총 쟁의현장 어디든 달려갔다. 해고노동자였던 그의 경력에 비추어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시위현장에서 집회자들에게 미란다 원칙을 알려주고, 경찰의 부당한 연행에 변호인 선임권을 요구하는 현장의 변호사다. 2008년 주위에서 그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노동위원장에 추천했다. 그는 노동위원장을 두 번이나 연임했다.(그의 능력이 출중해서라기보다, 거칠고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공대를 나온 ‘공돌이’에서 해고노동자로, 다시 ‘노동전문 변호인’으로 늘 ‘노동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노동자 변호사’라기보다 ‘변호사 자격을 가진 노동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실습복과 작업복에 익숙한 그는 변호사가 된 지금도 양복보다 활동복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변호사 품격을 떨어뜨리는 변호사’ ‘공돌이 변호사’라는 비아냥도 듣는다. 그도 스스로 비주류 변호사라고 말한다. 공권력 앞에서는 지옥에서 온 야차 같은 강성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혀 강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드럽다 못해 오히려 연약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앞서 영화 <변호인> 얘기를 했지만 권 변호사는 노무현 변호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림사건으로 세상의 눈을 뜨고 1985년 ‘노동법률상담소’를 열어 노동문제를 파고들었다. 권영국 변호사도 변호사 자격을 따자마자 민주노총 초대 법률원장, 민변 노동위원장 등 노동문제에 매달렸다. 노무현 변호사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고를 나온 것이나, 권 변호사가 공고를 나온 것이나 배경은 비슷하다. 변호사 시절 법정이나 변호사 사무실보다 거리에서 행동으로 변호하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노무현 변호사가 대우중공업 노사문제에 개입해 구속된 것이나, 권 변호사가 쌍용차 노사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기소된 것도 그렇다. 권 변호사를 보면서 ‘리틀 노무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노동자 시절이던 1987년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현대중공업에서 강연을 들었는데 ‘악법은 어겨서 고치는 것이다, 깨뜨려 고치는 것이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라’는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동료를 칭찬하는 데 인색한 직업이 바로 변호사들이다. 김용민 변호사는 “변호사는 불의를 보면 참지 말아야 하고,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전문지식을 활용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길 수도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권영국 변호사는 진정한 변호사”라고 평가했다.



“인권침해 현장이 변호인 있을 자리다”


지난 20일 법정에 참석한 38명의 변호인단을 보고 느낀 감회는.

“선임계 낸 변호인이 100명이 넘었다고 들었다. 지금도 늘고 있다고 한다. 노무현 변호사 공동선임계는 99명이 냈다고 하는데….”(허허~ 그는 좀 계면쩍다는 듯 웃었다)

집시법·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죄·일반 교통방해죄 등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한문 앞 화단 주변을 경찰이 24시간 점거하다시피 했고, 주변 집회를 금지시켰다. 대한민국 영토에서 법적 금지구역도 아닌데 경찰이 임의적 판단으로 집회 금지구역으로 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

그래서 모두진술에서 “이 재판은 민주주의와 기본권의 위기상황을 확인하는 재판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한 것인가.
“그렇다.”

최근 사법부 판결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법정의가 살아 있다고 보는가.
“회의하고 있다. 특히 올해 김용판·원세훈 판결에서 보여준 사법부 판결 태도는 정권의 정통성에 면죄부를 주는, 합리화를 위한 판결로 보인다. 사법부가 정말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믿을 만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노동전문 변호사로 우리 노동자의 권리수준은 어떤가. 경제규모에 걸맞는다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노동 기본권 수준은 OECD 국가 중에 거의 최하위라고 보면 된다. 헌법에 노동3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단결권을 부정하는 나라는 없다. 파업하면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유일한 나라다. 2011년 이것을 제한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는데 최근 예외를 인정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시대착오적이고 전원합의제 판결을 소부에서 뒤집는 위법한 것이다.”

우리 노동법 수준은 어느 정도 돼야 한다고 보나.
“노동법원이 생겨 노동문제를 전담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의 원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민사법 원리에 따라 노동쟁의를 바라보고, 범죄시하려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대부분 어려운 노동자 변론으로는 수임료도 별로 없을 텐데 가정생활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정적 부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수임료 받는다.”

생활에는 어렵지 않다는 말인가.
“(허허허) 생활은… 집사람이 불만이 있긴 하다. 재정적 어려움이 닥칠 때도 종종 있긴 하다.”(자신감이 넘치던 목소리가 이 대목에서 약간 어눌해졌다)

몸싸움도 마다않는 권 변호사에게 ‘변호사의 품위를 해친다’는 시선을 가진 변호사도 있다.
“그건 개인의 가치관이나 성격으로 활동양태가 다를 수 있다. 변호사가 인권침해에 대응할 때 꼭 법정이나 사무실로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 인권이 침해되는 곳이면 가장 필요한 쪽에 있어야 한다. 변호사의 임무는 인권옹호이지 비즈니스가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한 수순 아닌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권한은 매우 크다. 정말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라는 것을 출세를 위한 통로로 접근하는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박근혜 정부 들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인사’이다. 아무 때나 실실 웃다 장관직에서 면직되는가 하면, 사퇴한 총리를 재신임해 ‘재활용 총리’라는 말까지 나왔다.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인사에서 또 하나의 ‘신기원’을 만들었다. 무려 79세 최고령 공직자를 배출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 최고령 공직자(국회의원 제외)는 2006년 임명된 조창현 방송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시 나이 71세였다. 조 위원장은 67세에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돼 공직을 수행했다. 따라서 명예직이나 비상임이 아닌 상임 79세 첫 공직 임용은 역대 최고령 기록이다.

79세 나이로 상임감사 공직에 발탁

해당 분야에서 계속 일했던 것도 아니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어떻게 첫 공직자로 발탁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노령화 시대 ‘탐구감’이고, 인생 2막시대인 요즘 ‘귀감감’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인공은 바로 윤종승(자니윤) 관광공사 상임감사다.

지난 10월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자니윤 관광공사 상임감사가 국정감사를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0월 17일 오후 9시가 넘어 계속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관광공사 국정감사장. 설훈 위원장은 증인으로 자니윤 감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점잖게 “증인, 노익장이라는 말씀 알지요?”라고 질문했다. 자니윤 감사는 약간 귀가 어두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 위원장은 다시 “노·익·장, 노익장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한 자 한 자 띄어 말했다. 자니윤 감사는 “글쎄, 문자를 쓰시면 모르겠는데… 노익장?… 글쎄” 하며 얼버무렸다. 다시 설 위원장은 “아이”라고 한숨을 쉬면서 “모르면 모르신다고 말하세요”라고 추궁했다. 자니윤 감사는 “모르… 모르겠는데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설 위원장은 “외국에서 오래 계셨으니 모를 수 있지요”라며 “나이 드신 분이 힘써서 일하시는 모습을 노익장이라고 표현합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자니윤 감사는 “저는 첨 듣는 소리구요…”라고 말했다.

설 위원장은 다시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물었다. 자니윤 감사는 “일천구백삼십육년 10월…”이라며 “우리 나이로 79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설 위원장은 “79세면 이젠 은퇴해 쉬실 나이 아니겠나. 쉬시는 것이 상식에 맞다. 증인은 일할 의욕이 많고 일을 잘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니윤 감사는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들었다.

관광공사 노조 임명반대 성명 발표
자니윤 감사 임명에 관광공사 노동조합은 이례적으로 ‘보은인사의 끝판왕 상임감사 임명! 걱정을 어찌 안 할 수 있겠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제목에서 ‘끝판왕’이라는 표현은 박근혜 정부 인사참사의 결정판이라는 의미이다. 성명 내용은 ‘무참히 깨어졌다’ ‘정말 비통함을 감출 수가 없다’ ‘깊은 분노를 느낀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등의 참담한 표현이 줄을 이었다. 노조는 성명서에서 “자니윤은 어디서도 관광과 연계된 경력을 발견할 수 없는 미국인이자 한국인인 이중국적자”라며 “관광진흥기관인 관광공사의 감사 자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노조 관계자는 “과거에도 감사 자리는 낙하산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납득이 안 돼 처음으로 성명을 냈다”고 말했다.

자니윤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미국 연예계에서 성공한 방송인이다. 193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그는 “코리아도, 코리언도 아는 이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엔터테이너의 꿈을 꾸며 미국땅을 찾았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어학을 익힌 그는 1958년 미국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해군 복무 중 미국 일리노이에 있는 미 해군종합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업무와 전혀 연관없는 지원 이유
그는 3년 9개월에 걸친 미 해군 복무를 마친 뒤 1962년 웨슬리언 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성악을 공부하고,(학력란에 ‘수료’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졸업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년간 뉴욕에서 연기학교를 다녔다. 자니윤은 동양권 이민자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NBC방송 ‘자니카슨 투나잇 쇼’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1973년 뉴욕 최고 연예인상을 받으며 승승장구, 1978년 NBC방송에서 ‘쟈니 윤 스페셜쇼’ 메인 MC를 맡으면서 절정에 오른다. 미국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89년 한국에 돌아온 자니윤은 KBS에서 ‘자니윤 쇼’ 메인 MC로, 1991년 SBS에서 ‘자니윤 이야기쇼’ 메인 MC로 이름을 날렸다. 방송계의 한 인사는 “자니윤은 어눌한 한국말과 함께 토크쇼를 처음 도입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면서 “당시 ‘자니윤 쇼’를 연출한 사람이 이남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서 방송출연이 뜸하던 그는 2007년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와 만났다. LA에서 발행하는 한 한인 언론은 “2007년 2월 한인타운에서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근혜 미주후원회 발대식이 열렸는데, 이 행사를 준비하고 후원한 사람이 바로 자니윤”이라고 말했다. 자니윤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재외국민본부장, 재외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난해 관광공사 사장 하마평에 올랐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그의 매니저는 “자니윤이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내정돼 6월 임명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고, 결국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홍보본부장 출신의 변추석 사장이 임명됐다.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유진룡 문화부 장관이 경질된 것도 (유 장관이) 자니윤의 관광공사 사장 임명에 반대한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자니윤 감사는 자신의 임용을 반대하는 장관을 밀어낼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한 것이다.

자니윤은 우리나라에 토크쇼를 처음 도입,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2002년 자니윤과 가수 조영남이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방송계의 한 인사는 “그는 생각이나 스타일 모두 완전한 미국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집과 가족 모두 미국에 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국적자다. 관광공사 노조는 “자신의 이익도 놓지 못하는 사람이 공정하게 기업을 감시해야 하는 감사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니윤 감사는 방송·연예계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앞서 경력에서 보듯이 관광공사 같은 대규모 공기업을 경영해본 적도 없고, 회사에 다닌 적도 없고, 더더구나 회계감사를 해본 경험도 없다. 자니윤은 “27년간 미국에서 방송·영화·뮤지컬·유명 가수의 콘서트 등을 함께하면서 많은 제작자, PD들과 교분을 쌓았다”면서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으로 취임식에 초대되는 등 미국 주류 정치사회와 외교계에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감사 지원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인맥이 관광산업 진흥기관을 감사하는 업무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점은 국정감사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지적됐다.(상자기사 참조)

사실 직원 500여명에 매출 4000억원이 넘는 관광공사 감사는 매우 골치 아픈 자리다. 골프장·호텔 등 직접 영업도 하지만, 정부 예산이 섞여 있어 회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공기업 인사 책임자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자니윤 감사 임용에 대해 “대차대조표를 볼 능력도 의심이 되는 분”이라는 쓴 질문을 받기도 했다.

공기업 감사는 매년 ▲감사의 전문성·윤리성·독립성 확보 ▲내부통제 기능 강화 ▲내부감사 운영성과 및 사후관리 등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감사는 이 항목에 A~D 등급으로 평가받고 이 사실은 공개된다. 연봉과 경영성과금을 합해 1억3159만5000원(2013년 기준)을 받는 자니윤 감사는 1년 후 어떤 성적표를 받을까.



“유럽여행 다니며 관광 연구 많이 했다”

지난 10월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장에서 안민석 의원이 관광공사 자니윤 감사에게 질의하고 있다. | 국회방송 캡처


감사 자기소개서에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과 해외네트워크를 통해 자본을 유치하고, 할리우드 촬영을 유치하겠다고 했는데 이게 관광공사 감사와 관계 있는 것입니까.(배재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말씀하신 의도는 이해하고, 어… 옳으신 점이 많다고 보는데요, 저는… 그… 주로 하고 싶은 것은 외국 투자유치 이런 것 말씀하셨는데요.”

그건 제가 말한 게 아니라 감사님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배재정 의원)

“글쎄 제가 해봤는데요, 제가 외국에서 50년 살면서 소개서에서 말씀드렸지만 저, 지중해·동유럽·서유럽 다섯 번, 여섯 번 다니면서 관광에 대한 연구 많이 했습니다.”

변추석 관광공사 사장, 지중해 몇 번 다녀 왔어요?(안민석 새정치연합 의원)

“한 번 다녀왔습니다.”(변추석 관광공사 사장)

윤종성(자니윤) 감사 저 분 기준은 여행 많이 다녔으면 관광공사 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관광공사 감사라는 직책으로 본인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국적 회복은 언제 하셨어요.(안민석 의원)

“국적 회복은 작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글쎄 재작년같기도 하고… 어… 어.”

아무리 연로하셔도 대한민국 국적 회복을 한 날짜는 몰라도 연도는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기억 못하세요?(안민석 의원)

“아니 제가 국내에서 생활하는 게 너무 바빠가지고, 정신차릴 수 없습니다.”

감사 하시려고 국적 회복한 겁니까.(안민석 의원)

“국적요? 감사하려고 국적 회복한 게 아니구요, 65세 이상이면 국적 회복 할 수 있는 것 알아서, 제가 한국국적 50년 동안 버린 거 안타깝게 생각해….”

25년 전 캐디 폭행한 적 있습니까. 그 사건은 무슨 사건입니까.(안민석 의원)

“그 사건은 제가 들을 때마다 웃음밖에 안 나오는 겁니다. 왜냐면 제가… 사실이 아닙니다.”

130만원 배상판결 났는데, 증인은 한푼도 안 내고 미국으로 갔어요.(설훈 위원장)

“안 내고 간 것이 아니고 모르고….”

어쨌든 안 내고 갔어요. 간 뒤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방송출연했지요. 그 출연금에서 강제집행하려 하니까 그때서야 이자까지 포함해 갚은 사실 없습니까.(설훈 위원장)
“알고 있는 것 없고, (변호사가) 저한테 (그렇게) 한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이 사건은 1989년 10월 3일 경기도 성남 모 골프장에서 캐디들과 다투다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된 사건이다. 검찰 수사에서 무혐의 처리되고, 1992년 민사소송에서 캐디에게 130만원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자니윤씨는 그냥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나중에 귀국해 피해자들이 방송출연료를 강제집행하려니까 이자까지 포함해 배상했다)

조직을 운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김태년 새정치연합 의원)

“예? 없습니다.”

조직회계에 대해 결재하거나 감사해본 적 있습니까.(김태년 의원)

“회계학이오? 우리나라에서 해본 적이 없지만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공기업 준정부기관 감사 매뉴얼을 본 적 있나요.(김태년 의원)

“감사 매뉴얼은 서류,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준비하느라고 그 책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감사 매뉴얼을 봤다고 하는데, 자기소개서를 이렇게 씁니까. 이건 감사가 도대체 뭐하는지 모르고 쓴 것입니다.(김태년 의원)

“그건 제가 잘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구요. 감사라는 직은… 개인적인 것을 말씀 드리면, 건설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전에 감사하는 것이 사후에 감사하는 것보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불편한 진실’ 하나를 말해보자. 최근 카카오톡 감청 논란으로 사이버 망명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카톡 사용자가 이탈하고 대신 텔레그램이라는 외국 매신저가 각광을 받고 있다. 회사를 합병하고 멋지게 출범하는 다음카카오의 주가는 폭락하고, 급기야 사장이 법원의 감청영장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사이버 망명이 계속되면서 한국 IT산업의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사태는 9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도를 넘는 모독’”이라는 발언에서 시작됐다. 9월 18일 대검찰청에서 사이버 엄단 범정부 대책회의가 열렸고, 온라인 대피령으로 이어졌다.

이런 온라인 대피 분위기와 텔레그램을 처음 소개한 언론은 ‘불편하게도’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다. 김어준은 9월 26일 카톡 사용자 이탈을 감지하고 텔레그램의 안전성을 처음으로 소개했다.(이 팟캐스트 녹화는 24일 이뤄졌다. 실제 보도는 더 빨랐던 셈이다) 팟캐스트 방송 이후 무료앱 부문 111위에 불과했던 텔레그램은 일주일도 안 돼 1위로 뛰어올랐다. 한국에서만 무려 200만명이 넘는 사용자가 텔레그램으로 이동하는 사이버 엑소더스가 벌어졌다. 만약 기자가 ‘이달의 기자상’(기자협회에서 매달 수여하는 나름 가장 권위 있는 상) 심사위원이라면 당연히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 부문에 선정했을 것이다.

딴지그룹 총수 김어준 | 원희복 기자


기존 언론 물먹인 텔레그램 최초 보도
여기서 ‘불편한’이라는 표현은 개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팟캐스트가 기성 언론보다 앞서 특종을 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기자를 다수 보유하고, 해당 분야의 전담조직이 있으며, 수십년간 취재의 노하우를 가진 기성 언론이 물을 먹은 것(낙종)이다. 기성 언론 입장에서 당연히 불편하다. 기자 세계엔 나쁜 속성이 있다. 물을 먹으면, 물을 먹인 매체(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비난하는 것이다. 낙종에 대한 책임회피다. 이런 책임회피가 상습화되면 기성 언론은 카르텔을 형성, 해당 매체를 집단적으로 ‘왕따’시킨다.

김어준에 대한 기성 언론의 대응에는 솔직히 그런 점이 있다. 김어준은 ‘나꼼수’(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처음 도입했으며, 정치·시사 프로그램으로 많은 특종을 했다. ‘나꼼수 신드롬’을 일으키며 애플의 팟캐스트 정치·시사 부문 다운로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기성 언론 입장에서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날 만도 했다. <중앙일보> 김진 정치전문 기자는 ‘사실관계 확인에 소홀하고 비평 대상이 편파적’이라는 이유로 기성 언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질투가 ‘저주’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은 김어준에 대해 ‘반지성과 마초주의’를 넘어 ‘양아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언론노조서 주는 민주언론상 받아
사실 출연자 몇 명이 ‘떠드는’ 팟캐스트는 시사 토크쇼에 가깝다. 추론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너무 앞서 나가다가 오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무분별한 말을 쏟아내는 종편에 비하면 점잖은 축에 속한다. 팟캐스트도 사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밝히는 측면에서 분명 언론이다. 이미 그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에서 주는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게다가 요즘 언론 수용자들, 국민들은 프로그램을 다운받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매체를 찾아 듣고 본다. 이번 세월호 참사과정에서 다양한 팟캐스트, 인터넷 방송 등 이른바 ‘대안언론’이 각광을 받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들이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요즘 김어준의 팟캐스트는 보통 회당 200만명,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경우 500만명이 듣는다고 한다.(파파이스 측 주장) 이는 웬만한 일간신문 주간 발행부수를 능가하는 것이다.

김어준은 1968년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무원인 덕분에 2년간 미국물을 먹었다. 서울대학교를 세 번이나 낙방한 후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배낭여행을 시작, 졸업할 때까지 40여개국을 다녔다. 대학 졸업 후인 1995년 포스코 해외영업부에 근무하다가 8개월 만에 퇴사, 다시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여행이 자신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는 배낭여행과 인터넷을 결합한 여행상품을 개발한 여행사를 차려 돈을 잘 벌었다. 여행 중 만난 입양아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수완도 발휘했다. 하지만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사업이 망했다.

실업자 상태에서 심심풀이로 만든 것이 바로 개인 홈페이지 <딴지일보>다. <딴지일보>의 ‘딴지’는 ‘비주류 마이너리티’의 표현이다. 본인도 “패러디는 마이너리티의 언어”라고 말한다. 기성 언론에서 할 수 없는 제도권에 대한 풍자와 패러디, 또 풍부한 여행 경험이 먹혔다. 결정적 성공 계기는 2009년 모바일 시대에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플랫폼(소통기구)으로 ‘김어준의 뉴욕타임스’를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확신을 얻은 그는 2011년 4월 ‘나는 꼼수다’를 통해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통찰력과 해학적 매력 vs 짜증과 비아냥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등 새누리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스스로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통해 진보 집권 플랜을 제시하기도 했다. 무명의 문재인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야당 대통령 후보로 키우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의 비약적인 발전에 당연히 찬사와 비난이 쏟아졌다. 혹독한 실명 비평으로 유명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통찰력과 해학적 매력을 기반으로 다수의 ‘신도’를 거느린 ‘교주형 멘토’”라고 높게 평가한다. <삼국지 인물전>을 쓴 김재욱은 김어준을 주역과 수학에 정통해 앞날을 알아맞히는 재주가 있는 관로에 비유해 ‘영원한 자유인 관로’라고 평가했다.

서울 대학로 벙커1 화장실 벽에 써놓은 구호는 김어준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혹독한 비난도 많다. 기성 언론의 비판 이유는 앞서 설명했다. 진보비평가로 통하는 진중권은 김어준에 대해 “리버럴과 우익마초의 측면이 공존한다”면서 “나꼼수와 극성팬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했다”고 극언까지 했다. 하지만 김어준은 자멸하지 않고 훌륭히 사업을 하고 있다.

이념을 떠나 김어준을 가장 솔직하면서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사무실 화장실에 써붙인 구호(사진)이다. 기자는 이 구호가 김어준의 진면목이라 생각한다. ‘맨땅에 헤딩하자’ ‘해보자’ ‘쫄지 말자’ ‘가능하다’는 구호는 그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 즉 도전정신과 모두 이어져 있다. 아마 80여개국 여행에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쪽팔리게 살지 말자’는 그의 인생관이다. 비겁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배웠다는 사람들은 ‘정명’ ‘지성’ 등의 수사로 치장하지만 그는 포장하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분노하십시오’는 불의에 대항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김어준은 그 싸움을 ‘악착같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사무실 화장실에서 발견한 이 구호는 나약하고 의타적인 지금 젊은이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는 아닐까. 이념을 떠나 ‘불의에 분노하는 것’은 사실 현대 시민이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이다.

그가 언론인인지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인문학을 동경하는 자유로운 사고의 사업가이며 행동가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를 비판하는 기성 언론은 그의 ‘놀라운 성과’에 질투하는 것 아닐까.

“진보비평가의 비판에 관심없다”


팟캐스트를 들어보면 김어준은 굉장히 건방진 말투에 욕도 잘한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의외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기자를 만났을 때 담배를 피우려다 뒤로 숨기는 예절바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벙커1에서 만났을 때 김어준은 “시간이 너무 늦었고 녹화를 해야 한다”면서 “내일 SNS로 인터뷰하자”고 제안했다. SNS로 인터뷰하기는 기자생활 27년 만에 처음이다. 인터뷰는 10월 16일 저녁 8시25분부터 10시 넘어서까지 2시간 정도 이뤄졌다.

딴지그룹에 대해 간략한 소개와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

“(딴지그룹은) 최초의 인터넷 미디어. (앞으로 비전은) 버티자, 끝까지.”
(김어준은 법인명 ‘딴지그룹’의 법적 대표이사다. 직원 20여명이 근무하는 딴지그룹은 인터넷 신문사 <딴지일보>, 팟캐스트를 하는 <딴지라디오>, 온라인 상거래 업체인 <딴지마켓>, 그리고 <딴지까페>와 문화사업·특강을 하는 <벙커1>이라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딴지그룹은 최근 3년 동안 직원 20여명의 월급을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딴지일보 김용석 편집장은 “직원들의 노고에 비해 월급을 많이 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적게 주고 있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번 텔레그램 특종처럼 그동안 김어준이 내세울 만한 특종 3개와 오보 3개를 든다면.

“나꼼수 시절 선관위 디도스, 내곡동, 십알단이 특종, 오보가 아니라 흡족하게 확증해내지 못했던 것은 많다.”

IT분야에 대해 취재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전자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많은 제보자 덕분인가.

“관심, 취향, 제보, 정보, 추론, 직관, 조력.”(김어준은 여러 분야와 지역(해외 포함)에서 무보수로 기고하고 제보해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같은 멤버였던 김용민과 달리 기성 언론에 대해 맞대응(비난)은 안 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마땅히 이해해줘야 할 의무가 그들(기성 언론)에게 없다. 내 손을 떠난 메시지는 제 생명력만큼 생존할 것이고, 해서 억울한 게 없다.”

진중권 등 이른바 진보비평가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각자 제 몫을 하는 것이다. 당연해서 관심이 없다.”

감성진보를 표방하지만 텔레그램이나 세월호 진도VTS 교신기록 조작 등에서 보듯이 매우 과학적 논리를 추구한다. 정서가 논리를 이긴다는 지론과 배치되는 것 아닌가.
“논리는 툴(도구)이고, 정서는 OS이다.”(OS는 오퍼레이션 시스템의 약자로 컴퓨터 ‘운영체계’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가.
“없다. 인터뷰를 즐기지 않아서요. 꾸벅.”(하지만 김어준은 세월호 참사에서 에어포켓과 자신의 재판문제로 한동안 기자와 문자질을 계속했다. 그는 11월 10일 고법 결심공판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어느 정권이나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실세’가 있게 마련이다. 호사가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보통 임금 ‘왕’자를 붙인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박지원 수석이 왕수석으로 통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문재인 수석,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을 ‘상왕’으로 표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기춘 실장이 ‘왕실장’으로 불리며 독보적인 존재다.

그런데 최근 신예가 등장했다. 바로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요즘 왕실장인 김기춘 실장보다 ‘왕장관’ 최경환 부총리가 더 힘이 세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과거 김기춘 비서실장이 부산·경남(PK) 인사의 통로였다면 최 부총리는 대구·경북(TK) 인사의 통로”라며 “요즘 승진이나 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최경환 부총리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한 언론은 “당·정·청에 포진한 인맥을 보면 일각에서 그를 ‘부통령’이라 부르는 게 헛소문만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근혜노믹스’ 대신 ‘초이노믹스’
그의 위세는 최 부총리의 성을 딴 ‘초이(Choi)노믹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DJ노믹스나 레이거노믹스, 아베노믹스 등 대통령이나 총리의 이름을 딴 경제정책은 많지만, 정책 실무자의 성을 딴 경제정책은 별로 없다. 그런데 초이노믹스라는 명칭은 기재부 보도자료에 버젓이 등장할 정도로 통용되고 있다. 반면 ‘근혜노믹스’라는 말은 조용히 사라졌다.


최 부총리는 비단 인사뿐 아니라 정책에서도 실세임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지금 비난의 초점이 되고 있는 단말기유통법도 소관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와 방송통신위를 제치고 기재부가 주도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최 부총리는 취임하자마자 기준금리 인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통화정책을 주관하는 한국은행을 압박했다. 심지어 법무부 장관 소관이자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재벌의 사면도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위세가 오죽 하늘을 찔렀으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 7일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사면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은 직권남용 행위에 해당한다”며 그를 검찰에 고발했을까.

그에게 과도한 힘이 쏠리는 것은 ‘내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언’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 경제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은 돈을 쌓아만 놓고 투자는 안 해 돈이 돌지 않는다. 경제성장률은 3년째 3%대를 맴돌고 있다. 세수는 걷히지 않아 7월 말까지 세수진도율(목표 대비 징수실적)은 58.2%대에 머물고 있다. 이는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래 16년 만에 최저로, 엄청난 재정적자가 일어날 게 뻔하다. 10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는 더욱 가파르게 늘고 있다. 설상가상 외부적으로 엔저·달러 강세는 수출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

공직시절 별명은 ‘무대뽀’
이런 상황에서 최 부총리는 초이노믹스라는 칼을 들고 한국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섰다. 초이노믹스의 근간은 주택담보대출(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늘려 부동산경기를 활성화시키고, 저금리를 유지하며, 기업 활동을 촉진하도록 세제를 바꾸고, 41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경기부양·금리·세제·예산 등 4종 세트를 총동원한 경기부양책이다. 여기에 부족한 재원은 담뱃값과 지방세 대폭 인상으로 만회하는 ‘꼼수’도 포함됐다.

초이노믹스의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강남 부동산 가격은 오름세로 바뀌고 ‘최경환 주가’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주가는 2100선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채 두 달이 가지 못했다. 치솟던 주가는 추락했고, 오히려 최 부총리 취임 때보다 더 떨어졌다. 미국의 출구전략으로 국내에 유입됐던 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41조원의 재정을 투입해도 경제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난 8일 5조원 플러스 알파를 추가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과연 그는 위기의 한국 경제를 살릴 능력이 있을까. 그는 관훈클럽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최 부총리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 든다. 경제부총리가 되기 위한 ‘뻥’(허언)은 아니었을까, 그의 공직 시절 별명이던 ‘무대뽀’(일본말 무철포<無鐵砲>에서 유래한 말로 앞뒤 가리지 못하고 마구 달려드는 것을 의미) 스타일은 아닐까 등등.

9월 2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창조경제확산 위원회 출범 1주년 기념행사’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과거 능력을 먼저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행시 22회는 과거 100여명을 뽑다가 200여명 선으로 선발인원을 대폭 늘린 기수로, 최 부총리의 행시 합격은 어느 정도 운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최 부총리는 사무관 시절 별명이 ‘무대뽀’였다고 한다. 자신의 실수로 자료가 유출됐는데도 이를 보도한 기자와 욕하며 대판 싸웠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따느라 6년간 외유했던 그는 1997년 6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보좌관으로 ‘뜻을 펼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닥친 경제위기인 IMF 사태를 예견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사실 그는 경제주권을 빼앗긴 ‘죄인’이었다. 본부로 돌아와 법무담당관이라는 한직에서 공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이런 원죄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무원을 그만둔 그는 공기업으로 가지 않고 특이하게 언론사로 갔다. 물론 일선에서 취재를 하고,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기자가 아닌, 사설이나 칼럼을 쓰는 논설위원이었다. 그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기업의 자율은 극대화해야 한다’는 기업 친화적인 글을 썼다. 하지만 소득·법인세 인하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보였다. 언론사 시절 같이 근무했던 한 기자는 “한국경제TV에서 뉴스브리핑을 잠시 진행했는데 매우 적극적으로 프로그램 제작에 임했고, 후배에게도 깍듯이 대했다”고 말했다.

과거 성적표는 ‘건전화’보다 ‘부실화’
그는 언론사 생활을 하는 동안 TV 경제토론이나 대담에 많이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결국 그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대통령후보 상근 경제특보로 정치권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2004년 17대 총선에서 고향인 경북 경산·청도에서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원래 그는 이회창 사람이었지만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종합상황실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회창이 탈당해 만든 자유선진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에 임명됐다.

지식경제부 장관 시절 정책이 성공적이었느냐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완주 의원은 “(최근 석유공사는) 1조원 주고 산 캐나다 정유시설(노스 애틀랜틱 리파이닝)을 900억원에 팔기로 했다”면서 “이 정유회사를 살 당시 책임자가 최경환 장관”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에너지공기업의 부실은 매우 심각하다. 당시 공기업 부실 책임이 있는 최 장관이 현재 경제부총리로 공기업 개혁을 주도하는 것도 일종의 아이러니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후보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확실한 ‘친박’ 인사로 자리잡았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때부터 부총리는 물론 총리감으로까지 거론됐다. 최 부총리는 정치적 능력만 놓고 봤을 때 성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그의 경제적 문제해결 능력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경제의 운명, 국민의 생존권이 달린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 부총리의 능력에 대해선 안심보다 우려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는 공무원 시절 주요 정책을 실무적으로 담당해본 경험이 적었다. IMF라는 미증유의 환란이 닥쳤을 때도 청와대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MB정부 시절 지식경제부 장관을 맡았을 때는 공기업 부실의 책임까지 있다. 그의 경제 해결능력 성적표는 ‘건전화’보다 ‘부실화’가 많다. 누가 봐도 ‘꼼수적 증세’인데, 증세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을 보면 유연한 경제정책가가 아닌 고집스런 정치가의 면모까지 보인다.

국민들도 초이노믹스에 대해 크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내일신문>이 여론조사기관 ‘디오피니언’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9월 30일·전국 성인남녀 800명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의 55.7%가 초이노믹스에 대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응답한 반면, 성공할 것이라는 의견은 31.6%에 그쳤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의 약속이 ‘보증수표’가 될지 ‘부도수표’가 될지 아직은 점치기 힘들다. 이 경제위기를 훌륭히 극복하면 그는 대권까지 넘볼 수 있는 큰 정치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 반면 부도수표를 날린다면 그는 역사와 국민에게 큰 죄를 짓게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정치적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지금 일생일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국민공감 얻어 증세하겠다”


최경환 부총리는 10월 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관훈클럽이 주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최 장관은 경제 전반에 대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이 중 주요한 대목만 요약해본다.

적십자회비를 5년간 한푼도 내지 않은 사람을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임명했고, 회계장부조차 잘 보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자니윤씨를 관광공사 감사에 임명했다. 이 모두 기획재정부 산하 인사위원회에서 한 것이다.
“허허허.(웃음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낙하산 문제는 이 정부만 아니라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다. 외부인사라고 무조건 낙하산이 아니다. 직책에 맞는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경영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급적이면 전문성을 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문성 없는 사람이 많다. 정통성도 명분도 없는 낙하산 인사로 공기업 개혁을 이룰 수 있는가.

“공공부문 개혁은 차질없이 되고 있다. 낙하산과 상관없이 강도 높게, 지속적으로 공공개혁을 추진하겠다.”(질문은 현실을 얘기하는데 최 부총리는 원론적인 답변으로 일관, 질문과 답변이 겉돌고 있다)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 혹은 가석방 문제가 논란이 됐다. 법무장관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나.

“(웃으며) 없었다.”

경제난 극복을 위해 구속된 재벌 총수를 가석방, 사면해야 한다는 것은 자칫 국민의 법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

“가석방의 요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 충족되면 하라는 것이다. 기업인이라고 역차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기업쪽 하소연을 듣는데, 기업 총수가 구속돼 있는 상태에서 대규모 투자를 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한다. 특히 외자유치 때 주요 그룹의 총수가 구속된 상태에선 아무래도 어렵다. 일부 언론이 사면·복권까지 얘기하는데 그건 아니다.”

서민증세이 논란 뜨겁다. 특히 2004년 노무현 정부 때는 담뱃세 500원 인상에 반대했다. 그때는 왜 그랬나?

“담뱃값은 2004년 500원 올린 이후 10년째 안 올렸다. 그 사이 다른 나라는 많이 올렸다. 그러다 보니 담뱃값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가장 싼 편에 속한다. 성인 흡연율이 최고이고, 청소년 흡연율이 성인 흡연율과 같다.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되겠다 싶어 담뱃값 인상안을 국회에 낸 것이다. 담뱃값 인상 필요성이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높아진 것이다.”

야당 시절 담배는 서민이 많이 피워 서민 역진세 성격이 있고, 흡연율을 낮춘다는 결정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었다. 여야 입장이 바뀌어 달라진 것 아닌가.

“허허허.(자신감 있는 웃음을 지으며) 세계적으로 흡연율 감소에 값 인상이 효율적이라는 보고가 많다. 경제정책, 가격정책은 만고불변이 아니다. 상황에 맞게 바꾸는 것이 정책하는 사람의 자세다. 과거 무슨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정책을 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니다.”

담뱃세에 국세인 개별소비세를 신설했다. 그러고도 증세가 아닌가.

“증세는 아니다. 국민 건강을 위한 조치다.”(최 부총리는 매우 고집스럽게 ‘증세는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주민세, 자동차세를 올렸다. 세금은 올리지만 증세는 아니라는 주장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논리의 연장 아닌가.

“주민세는 26년 전 그대로다. 그 사이 물가가 5배 이상 올랐다. 자동차세도 10년 정도 안 올렸다. 이건 증세라기보다 현실화라고 해석해야 한다. 세금도 그때그때 현실화하는 것이 맞다.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은 지방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중앙정부가 수용한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65%가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증세 없는 복지의 진실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나.

“현 단계에서 증세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어떡하든 경기를 살려 세입을 늘려야 한다. 버틸 때까지 버티는 것이 정부의 자세다. 하다 안 되면 국민의 공감을 얻어 증세를 할 것이다. 현 단계는 버틸 만하다. 실질성장률 4%만 되면 가능하다. 분기별 1% 성장인데, 세월호 때문에 0.5%로 반토막 났다.”

증세를 한다면 직접세를 우선 올릴 것인가. 간접세를 올릴 것인가.

“증세 안 한다. 현 단계에서 증세는 절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최근 오드리 헵번이라는 영화배우 이름이 인터넷 포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됐다. 이미 타계한 1950~1960년대 서양 영화배우가 뜬금없이 화제 인물로 등장한 이유는 바로 이인호 KBS 이사장 때문이다. 그는 9월 23일 전경련 주최 ‘우리 역사 바로보기’ 강연회에서 “해방 직후 박헌영의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 때문”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친일청산 문제에 색깔을 들이댄 ‘새로운 이론’이어서 논란이 컸다. SNS 상에서는 “그러면 친일파 등용은 미국 지령이었냐?” “보수주의자 드골이 나치 부역자 처벌한 것도 소련의 지령이었나?” “이인호 이사장 임명은 아베의 지령에 의한 것인가?” 등등 각종 패러디와 비아냥이 넘쳐났다. 다른 한쪽에서는 친일파 조부 때문에 공직에 임용될 수 없다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라는 반박도 이어졌다.

이인호 KBS 이사장이 2013년 5월 31일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는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상황에서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결정적 어퍼컷을 날렸다. 전씨는 9월 25일 “오드리 헵번은 나치당원이었던 아버지 대신 속죄하기 위해 평생 봉사하며 살았습니다”라며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역사가 고결한 사람을 낳고, 부끄러움을 덮는 역사가 파렴치한을 낳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전씨는 특히 “오드리 헵번이 나치당원이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치를 두둔했다면, 그의 가문은 치욕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며 “죄 지은 조상을 두둔하는 건,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가문 전체에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할아버지 이명세, 친일파인명사전에
여기서 이 이사장의 할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이명세(李明世·일본식 이름 春山明世·1893~1972)는 조선시대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종3품 관리였다. 고종은 1887년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94년 아예 폐지했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일왕의 하사금으로 경학원을 부활시켰다. 목적은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일제는 조선 유림의 연합체인 조선유도연합회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케 했다.

이명세는 바로 이 경학원의 사성(司成·관리)과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를 지냈다. 특히 이명세는 1942년 일제가 조선에서 시행한 징병제를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하고, 강연을 다니는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행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파 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이명세는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하는 등 단죄되기는커녕 영화를 누렸다.(이인호 이사장의 외가쪽 할아버지 이범세는 구한말 규장각 부제학을 지내고 한일병합 후인 1911년 경기 양평으로 낙향해 살았다)

역사학자로서 해방 후 친일청산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이 이사장이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는 말을 하자 같은 역사학자인 전용호씨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비유해 비난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이사장을 조선시대 ‘간신 유자광’에 비유하며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25일 성명을 내고 “명색이 학자 출신인데 최소한의 양식마저 저버린 저 노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며 “마치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켜 숱한 무고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간신 유자광의 현신을 보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간신 유자광에 비유한 이유로 ‘역사를 악용했다는 점, 권력에 유착했다는 점, 반대세력을 무고했다는 점’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소련역사 연구로 하버드 박사 취득
이 이사장은 1936년생으로 올해 만 78세다. 은퇴시기도 한참 지난 나이에 다시 주요 공직을 맡으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 이사장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를 다니다 미국 웰슬리대로 유학한 뒤 하버드대에서 ‘소련 18세기 사상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최초의 한인 여성박사다. 그가 미국에서 소련 역사를 공부할 당시인 1950~60년대는 냉전적 분위기가 극심할 때로 한 시사평론가는 “이인호씨가 이때 미국에서 소련 역사로 박사학위를 딴 것은 1970년대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에서 한국 역사로 박사학위를 딴 것과 비슷하다”고 비꼬았다.

이 이사장은 1967년부터 컬럼비아대학 등에서 겸임교수를 하다 1972년 귀국, 고려대에서 강의했다. 서울대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79년이다.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 나름 진보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이 시기 러시아 혁명과 인텔리겐차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영국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의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특히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만들어질 때는 강만길, 이만열 등 진보적 역사학자들과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으로 나타났고, 이런 인연으로 1996년 2월 핀란드 대사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 대사 시절이던 1998년 1월 그는 남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제자 황인욱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3월 그를 러시아 대사에 지명했다. 당시 그의 러시아 대사 지명에 대해 다양한 우려가 제기됐다. 거친 러시아 외교무대에서 여성이 버틸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문제지만 1950년대 냉전시기에 반공지도자를 양성했던 하버드대에서 소련사를 전공한 인물이라는 점이 논란이 된 것이다.(실제 자신도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고 훗날 실토했다) 하지만 여성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던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러시아 대사로 임명했다.

역사정의실천연대와 언론시민단체 회원들이 9월 30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 이인호 이사장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이 대사는 부임 후 3개월도 안 돼 한·러 외교관계에서 최악의 갈등국면을 초래했다. 그해 7월 러시아는 스파이 활동을 이유로 한국의 조성우 참사관을 추방했고, 한국도 주한 러시아 참사관을 맞추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이 대사는 국정원과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해 참사관의 추방 이유도 몰랐고, 게다가 러시아 외교부에 불려갔을 때도 러시아의 모욕적인 언사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시류에 따라 자신의 행동 부정하기도
당시 외교부 관계자는 “외교마찰은 기본적으로 우리 측이 러시아의 최근 기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온 것으로 판단된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다. 부임 3개월 만에 이 대사의 경질이 거론됐지만, 김 대통령은 박정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경질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첫 번째 외교적 패배이며, 국제적 망신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인호 대사는 이후 1년여 동안 더 대사직을 수행했다.

2000년 공직에서 물러난 이 이사장은 이후 특별한 활동이나 튀는 발언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역사 바로세우기, 즉 친일청산 운동이 불거지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사장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할아버지 이명세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자, 본격적인 뉴라이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도 ‘유혈사태’로 폄훼하고, 자신이 직접 참여했던 역사문제연구소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대한민국 전복행위’로 규정했다. 특히 러시아 대사를 지냈음에도 대북문제에 대해 냉전적 입장으로 돌아서고, 자신을 공직에 임명했던 김대중 정권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상자기사 참조)

이러한 변신 끝에 그는 자신의 경력과 무관한 KBS 이사장이 됐다. 이 이사장은 취임하자마자 방송법에 따라 공개하도록 돼 있는 이사회 속기록 공개를 거부하고, 이사회가 프로그램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송계에서는 이를 방송 통제와 역사왜곡에 나서려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이사장의 행보에 대해 “한때 진보 역사학계를 기웃거렸던 그가 뉴라이트의 대부로 화려하게 변신하며 역사왜곡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면서 “문민정부에서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양지만을 찾아 다녔다”고 평가했다. 역사를 전공한 이 이사장의 인생사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다. 무엇보다 이 이사장은 자신이 한 행동도 시류에 따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의 변신 과정을 보면 친일파 할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오드리 헵번이 훌륭히 극복하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던 바로 그길을 가지 못하고 거꾸로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평생 드넓은 세계사를 조망했지만 정작 좁디좁은 집안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한 ‘불운한 역사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방송매체가 정부에 장악됐다”(이인호 어록)


“지금 다시 조명되는 제주 4·3사태라든가, 여수·순천 사건이라든가 그런 것이 공산당의 체제전복 시도에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명명백백 역사에 다 나오는 사실이다.”(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주최 강연·2006.1.19)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끝나야 할 분이다. 살아 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건국6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공동준비위원장 인터뷰·2007)

“식민지 시기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고 그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건국의 기준은 나라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느냐에서 찾아야 한다. 건국의 기원을 상해 임시정부까지 올리는 것은 정신사적에서만 유효하다.”(한국일보·2008.7.6)

“KBS의 ‘이승만 2부작’(2008년 8월 방송)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긍정적인 측면은 묵살하고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거대한 역사왜곡을 감행했다.”(동아일보·2008.9.8)

“언제부터인가 우리 언론은 방송매체가 정부에 장악되고 좌파정권의 도구가 되고 신문과 방송이 갈라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불상사를 나타내고 있다.”(‘좌파정권 재등장 반드시 막아야 한다’ 대한언론인회 이인호-송복 특별대담·2009.12.11)

“한강의 기적은 이승만 시대의 유산을 활용한 덕분이다. 4·19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라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훼손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승만과 4·19는 같은 세력이다.”(중앙선데이·2011.4.17)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청와대 원로 오찬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2013.3.13)

“역사청산위원회라는 것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을 모두 했다. 제주 4·3사건, 광주사건, 모든 것을 정부가 잘못했고 정부에 항거해서 일어난 소위 민(民)이 국민이고 그쪽이 헌법기관이다, 이따위 식의 조사보고서나 재판 결과들이 나왔다, 대한민국 전복은 이미 그때부터 공공연하게 시작됐고, 정부가 앞장을 서고 돈을 댔던 것이다.”(한반도선진화재단 주최 강연·2013.10.29)

“(문창극 총리 내정자의) 교회 강연을 보고 감동받았다. (문씨가) 낙마한다면… 저는 솔직하게 이 나라를 떠날 때라고 강하게 느낄 것이다.”(TV조선 ‘시사기획 판’에 출연·2014.6.19)

“이승만 박사가 박헌영을 만나 ‘소련과 손을 끊고 나와 손을 잡고 하자’고 제의했으나 박헌영이 거절했다. 그때 박헌영이 ‘친일파 청산부터 해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그건 결국 소련에서 내려온 지령 때문이다.”(전경련 주최 ‘우리 역사 바로보기-진짜 대한민국을 말하다’ 강연·2014.9.23)

“방송은 독립성·공공성을 보장해야 되기 때문에 이사들은 프로그램에 대해서 논평도 비평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KBS 첫 이사회 발언·2014.9.17)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9월 23일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가톨릭 성직자 세미나가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신부는 300여명. 이날 세미나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무거웠다.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대해 사제들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한참 토론한 끝에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

1974년 창립결의문 낭독
이날 결의로 만들어진 행동하는 신부들의 모임이 곧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여기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계속되던 시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 신도이던 시인 김지하에게 도피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는 간첩조직인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해 ‘내란음모’를 꾀했다는 혐의(긴급조치 위반)로 지 주교를 구속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헌법은 폭력과 공갈,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유신체제는 지 주교의 내란음모를 인정해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9월 26일 한국순교복자대축일에 명동성당에 모인 전국의 사제들이 제1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 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기도회를 계속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변인으로 결의문과 성명을 발표한 사람이 바로 함세웅 신부(아우구스티노)였다.

두 차례 투옥, 감옥서 ‘서울의 봄’ 맞아
정의구현사제단은 곧 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각계가 연대해 유신에 정면으로 저항한 민주구국선언문 발표(1976년 3월 1일), 5·18 광주항쟁 진상 폭로(1980년 5월 30일),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직선제 개헌 촉구 선언(1987년 4월 23일), 정권의 야만을 알린 박종철군 고문치사 수사조작 폭로(1987년 5월 17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1999년 9월 7일), 이라크 파병 철회 촉구(2004년 6월 28일) 등등 정의구현사제단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의구현사제단에는 함세웅 신부의 성직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예수님은 루카복음 4장 18~19절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감옥에 갇히고, 눈 멀고, 억압받는 모든 분들을 위한 구원자이자 치유자이며 ‘해방자’이다”라면서 “이런 예수님이 내 실존의 근거와 목적”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구원과 치유, 나아가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일에 매진했다. 최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과 너무나 닳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당에서 나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장으로 가라. 빼앗긴 사람들의 현장에 가서 손잡고 우리들 사제에게 흙물이 튀겨도 현장으로 가라”고 말했다.

함 신부도 그랬다. 고난의 현장, 특히 감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의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유신체제에서 두 차례 투옥됐다. 1979년 현직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되는 10·26 사건 때도 수감 중이었다가 1979년 12월 18일 겨우 출감했다. 그 후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위한 단식기도, 길거리 미사, 반전·평화 미사 현장에는 늘 함 신부가 있었다.

그의 오랜 ‘민주화를 위한 고행’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휴지기’에 들어섰다. 이후 함 신부는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문제 청산과 남북화해문제(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공동대표)에 진력했다. 그리고 오랜 민주화운동 경력을 살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고 기념하는 일을 맡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다시 거리로
불행한 건 그의 싸움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싸움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퇴행이 노골화됐고, 함 신부는 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함 신부는 국민보다 정권, 서민보다 가진 자를 우대하던 이명박 정부를 꾸짖었다. 그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사업 등 전체적으로 본다면 다 반인간적·반자연적·반역사적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등장한 박근혜 정부는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선거에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더니, 내란음모 혐의로 정당까지 해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무엇보다 친일파가 득세하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3월 2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권 부정선거와 증거조작 특검 촉구, 부정선거 감시 호소 각계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심지어 지 주교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한 것과 같은 ‘가톨릭 탄압’ 분위기가 재연되는 분위기다. 지금 경찰은 정의구현사제단 박창신 원로신부(72)의 사법처리 수순을 밟고 있다. 박 원로신부는 지난해 11월 22일 군산 수송동 성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집전하면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평소 친일 청산과 민주 회복, 남북화해를 주창해온 그로선 너무 참담한 일이었다. 2013년 9월 23일 사제단은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건을 규탄하는 시국미사를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제들이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것은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구속사건도 그의 마음을 허탈하게 했다. 함 신부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정치적 박해가 용인되는 사회, 종북이라는 딱지 하나로 공공의 적이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사회, 이 비정상의 사회가 만들어낸 유령이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함 신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해법에 대해서도 명쾌하다.

“첫째 진상을 규명하고, 둘째 진상규명 결과에 따라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하고 나타난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후 배상과 보상을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고, 셋째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감시하면 된다.”

함 신부는 “세월호 특별법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정부와 여당, 야당이 어쩜 저렇게 무능할 수 있느냐”고 한탄했다.

그는 평생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인 ‘청년예수’를 닮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운동권 신부, 종북 신부, 심지어 사제단을 좌익 혁명기지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비난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 그분의 삶을 전해주는 복음서의 증언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가톨릭 사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사제는 이웃을 위한 이타적 존재이다. 나는 바로 그런 사제들 중의 한 사람이다.”



“두 추기경은 시대고민 없는 수구적인 분들”


1974년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주도한 입장에서 40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것으로 봅니다.

“저는 사목현장에서는 은퇴한 사제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일들은 늘 새 세대와 함께합니다. 한 시대의 주체가 되는 시간과 사람은 달라져도 ‘인간 존엄’의 가치는 여전히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들에게 ‘감회’ 같은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지요. 충실한 삶, 늘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람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종합하며 입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교황님은 가슴과 심장,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저도 많은 분들의 감동과 예찬에 공감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반추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단어가 ‘가난’입니다. 성서의 핵심이지요.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 함께 나누는 삶, 그 실천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 사회 공동체 특히 교회 공동체에 속한 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저항적 가난’의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수도자와 스님의 자발적 가난은 아름답지만, 불의와 부정부패, 탐욕의 결과인 비참한 가난도 있습니다.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는 아름다운 가난이 바로 ‘저항적 가난’입니다. 불의한 정권과 불의한 기업, 탐욕에 종속된 우리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도 깊이 반성해야 할 내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달리 우리 정진석·염수정 두 추기경은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 한 명(김수환 추기경) 시절보다 추기경의 존재감이 없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보수는 참된 가치와 진리를 보존하고(保) 지키는(守) 아름다운 일입니다. 따라서 참된 보수는 필연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보수란 말이 참뜻을 잃어버리고, 남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적인 분입니다.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동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동시에 진보적 가치를 지닌 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두 교구장은 보수적인 분들이 아니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지 않은 수구적인 분들이라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용공’이라는 이름이 요즘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습니다. 내란음모를 꾀했다며 정당까지 해산하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죽산 조봉암 선생님을 사법살인하고 당시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습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님의 사건에 대해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현 정부는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도 이념 갈등과 정보부를 이용한 간첩공작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파멸했습니다. 평가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불법·부정행위에 대한 징벌적 배상과 손해배상에 대한 법률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를 통한다면 불법행위에 대한 최소한의 예방조치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