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보는 여전히 미스터리했다. 연락도 무슨 간첩 접선하듯 해야 했다. 사무실로 전화할 때마다 외국에 나가 있다고 했다. 연락처를 남겨두라고 했지만 열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나중에는 e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이쪽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e메일로 연락을 했지만 답장이 없다. 몇 가지 서면 질문지를 보냈지만 원고 마감까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2주 동안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될 듯 말 듯’ 하다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김영환(51)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주사파를 이식한 이다. 그는 1991년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북한에서 미화 41만 달러를 받고 돌아와 지하혁명당을 만들어 남한체제를 전복하려 했다. 그러다 180도 생각을 바꿔 전향했다. 그는 지금 북한 민주화를 주장하며 북한에 삐라를 뿌리고, 북한의 붕괴를 추진하는 극우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중국에서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통합진보당 재판에 정부측 증인으로
50대 초반의 그는 매우 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지만 이렇게 180도 바뀐 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지난 10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신청에서 신청인 측(정부 측) 증인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지도했던’ 후배들에 대해 ▲통합진보당이 여전히 종북 혁명세력에 장악돼 있다 ▲이석기는 여전히 폭력혁명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회의원 이상규, 김미희 의원이 북의 자금을 받아 선거에 출마했다며 후배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그는 과거 자신의 법정 증언을 여러 번 번복했다. 그때마다 과거 증언이 ‘형식적 위증’이라고 항변했다. 또 출마자에게 돈은 줬지만 그 돈이 북한에서 온 것은 몰랐을 것이라는 등 일관성 없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의 증언은 나름 당당했지만 어떤 때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질문 상대와 의도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증언 도중 갈증을 느끼는지 물도 많이 마셨다.

그의 이번 헌재 증언에서 눈길을 끈 것은 국정원 프락치 논란이었다. 이날 피신청인 측 이재화 변호사는 “전향하려고 마음까지 먹고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하고 기관지에 14차례나 북한을 적극 찬양했다”면서 “순수하게 혁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함정을 파고 활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김영환은 다소 놀라는 표정으로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활동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그런 일을 할 특별한 이유와 동기도 없다”고 강변했다.(상자기사 참조)

이 논란의 전후 배경은 이렇다. 그는 서울대 공법학과 82학번으로 독서모임 등을 통해 운동권에 몸 담았다. 1986년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1988년 출소한 그는 1991년 밀입북한다. 북한의 공작금을 받아 돌아온 그는 1992년 민혁당을 만들어 학생운동권에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그의 주사파 이론은 학생운동권에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북한에 회의 가졌지만 지하당 조직?
하지만 그는 전향을 결심하고 1999년 국정원에 사상전향서를 제출, 이례적으로 공소보류 처분으로 풀려났다. 많은 후배들은 구속됐다.

문제는 그가 운동권에 회의를 느낀 시점이다. 그는 사상전향서에서 1991년 밀입북했을 때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을 둘러본 뒤 회의를 느꼈다고 썼다. 나중에는 이보다 앞선 80년대 말 동구권 몰락 때부터 운동권에 회의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가 북한 체제나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꼈다면 지하당을 창당하지 않거나, <강철서신> 제작을 중단하거나, 아예 운동권을 떠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회의를 느꼈다면서도 지하당을 만들어 후배를 계속 끌어들였다. 그 후 본인과 몇몇만 전향하고 나머지 후배들은 처벌을 받게 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날 헌재 재판관도 김영환의 이런 행보에 의문을 제기하며 별도 질문을 했다. 통합진보당은 성명에서 “원래부터 국정원 협력자였던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해명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와 같이 서울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그는 건강을 위해 밥 한 숟갈을 40~50회 씹고 넘기고, 물도 씹어 먹는 매우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며 “이른바 <강철서신>은 김영환이 연필로 쓴 초안을 선배에게 회람을 받고, 다시 후배에게 돌려 검토한 내용을 일일이 지우개로 지운 후 다시 쓰는 치밀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감방 동료들은 “감방에서 바둑판 놓고 알까기를 이길 때까지 하자는 집요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2012년 7월 20일 중국 공안에 억류됐다 추방된 김영환씨가 인천공항으로 입국해 기자들에게 소감을 말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그런 그가 자신이 몇 년 동안 벌여놓은 일을 하루아침에 접고 180도 돌아설 수 있을까. 사실 그가 1999년 8월 국정원에 출두해 조사를 받고 공소보류 판정을 받을 때에도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그는 당시 가장 진보적 잡지인 <말>지와 가장 보수적 잡지인 <월간조선> 두 극과 극의 매체를 ‘활용’하는 주도면밀한 수완을 보였다. 국정원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가 아니라는 엇갈린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극보수 정치인 정형근 의원은 “그는 2중간첩”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어째됐든 결과가 입증하지만 그는 나쁘게 말하면 ‘배신’한 것이고, 점잖게 말하면 ‘전향’했다. 배신을 하건, 전향을 하건 보통 사람이라면 과거 동지·후배에 책임감, 혹은 연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향을 입증하려는 듯 더욱 혹독하게 운동권 후배를 비난한다. 이에 대해 같이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이재화 변호사는 “보수건 진보건 인간은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면서 “김영환에겐 아무런 철학도 논리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고 혹평했다.

‘사상전향 세 가지 유형’의 복합형
우리 현대사에서 ‘전향’은 일제강점기 반일에서 친일로의 변신에서 비롯된다. 이후 분단상황에서 전향은 좌에서 우로의 변신을 의미했다. 진보운동가 이심산은 <한국의 사상전향에 대한 세 가지 유형>이라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심산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을 하다 해방 후 서울시경 사찰과에 특채돼 과거 동지 소탕에 앞장선 양한모 유형, 60년대 초 서울대 운동권의 리더였다가 후에 <조선일보>에서 극우논객이 된 류근일 유형, 그리고 70년대 서울대 운동권의 김문수가 보수정당에 들어간 유형 셋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과거 동지를 처단한 양한모 유형은 한국적 전향의 전범으로, 엘리트 집안의 류근일 유형은 봉건적 자유주의자 전향 유형으로 분류했다. 아예 과거를 외면한 김문수 유형은 몰락한 가정의 생계형 전향으로 평가했다. 김영환의 전향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포함될까. 김영환은 유복한 집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글로 자신의 과거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번처럼 과거 동지를 적극적으로 단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유형 모두에 해당된다.

<삼국지 인물전>을 쓴 작가 김재욱은 김영환에 대해 “머리는 좋은데, 자기 진영을 배반한 서촉 유장의 모사 장송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서촉의 장송은 주인 유장을 배반, 서촉지역의 지도를 들고 조조를 찾아갔다. 그런데 조조는 장송을 실컷 두들겨패고 쫓아냈다. 장송은 나중에 유비와 의기투합했지만 마지막은 비참했다.

이번 헌재 증언을 보면 김영환은 여전히 자신을 혁명가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독재정권 탄압에 시달리는 북한 민중을 자유롭게 하겠다”고 주장했다. 그와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한 인사는 “그는 군부정권과 싸웠다는 일종의 영웅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서 “지금 그는 강적인 북한과 맞붙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재화 변호사가 “북한 민주화는 북한 민중이 할 문제인데, 남한 문제에는 침묵하고 북한 문제만 거론하면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쏘아붙였다. 이 질문을 받은 김영환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국정원과 연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학생운동에 참가한 동기는.
“고등학교 때부터 유신과 전두환 정부에 반감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민주화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입학해 운동권 동아리에 가입했다.”

지난 10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김영환씨가 증언하고 있다. | 헌법재판소 영상캡처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삶도 바꾸겠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

지금 노동자·농민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공장에서 일해봤는데, 당시 한 달 월급이 6만5000원이었다. 물론 그때 물가와 지금 물가가 차이가 있지만 6만5000원으로 정상적 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남한에서) 광범위한 비정규직 문제나 차별의 실상은 안 보이나.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과 다르다. 그때와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주체사상의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은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주체사상은 극단주의가 아닌 사상·의지·용기·결단 등 인간의 주관적 요소를 중시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또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 식의 지나치게 냉소적·서구식 논리전개가 아닌 동양적 정서에 부합해 관심을 끌었다.”

(민혁당 활동 당시) 북한에 가 노동당에 가입하고 김일성을 만난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가 있나.
“(내가) 노동당 지도원임을 아는 사람은 하영옥, 박○○, 조○○, 김○○ 네 명이다.

1991년에 전향할 생각이었다면 1992년 민혁당을 창당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글을 14회나 쓰고, 왜 그랬냐.
“사실 북한 방문 이전부터 1989년 하반기 베를린 장벽·동유럽 붕괴를 보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운동권에서 빠져나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민혁당(주사파 전체)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전체를 설득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민혁당 혁명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으로 함정을 파고 활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국정원과 연계돼 위장활동을 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할 특별한 이유와 동기도 없다. 민혁당 기관지 <빛>을 세심하게 읽어보고 분석한 사람은 알 것이다. 행간을 통해 변화된 사상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전향을 결심하고도 1998년까지 북한 지령을 따른 이유는.

“북한이 하영옥을 비롯한 다른 민혁당 간부와 접촉해 연결선을 갖게 되면 민혁당 위원들을 사상전환시키는 데 장애물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북한의 새로운 공작을 막기 위해 사상전환을 속이고, 민혁당 해체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민혁당에서 하영옥을 제외한 상층부 인사 대부분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밑에서 모르고 사회진보활동을 하던 후배만 처벌받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노동당에 가입했다가 처벌받은 사람이 40%다. 민혁당 평당원은 10%가 처벌됐고, RO(혁명) 조직원을 포함하면 2~3%밖에 처벌되지 않았다. 아이러니라고 보지 않는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하영옥을 통해 지방선거 500만원, 총선 1000만원을 지원했다고 하는데 받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받았는지 알고 받았나.
“민혁당 조직원들은 중앙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북한에서 온 돈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나.
“알 수 없었다.”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 사람들을 1999년 이후 만나 대화한 적이 있는가.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전해 들은 것은 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대화도 안 나누고, 활동도 안했는데 여전히 폭력혁명을 추종하고 있다고 믿는 근거는 뭐냐.

“간접적 접촉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전해 들었다. 공개 TV토론이나 세미나, 사적 서클 동문회 등에서 폭력혁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여전히 혁명가이며, 민중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하는데 증인이 지금 추구하는 혁명은 도대체 뭐냐.

“북한 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에 탄압받고 시달리는 북한 민중을 구출하겠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은 별도 나라로 북한 민주화는 북한 민중이 할 문제이고, 진정한 혁명가는 남한 민주화에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르헨티나 사람이 쿠바혁명에 참여했듯이 우리 국민이라고 북한혁명을 하지 말라는 법은 혁명사에서 없다고 생각한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