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사진 한 컷이 10개 기사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사진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실제 로버트 카파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쓰러지는 병사’ 사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걸작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신 사진 보도가 4·19혁명을 촉발시켰다.

사진은 보통 그 자체로 말한다. 그런데 한 장의 사진을 보완·설명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텍스트(문서)를 검증하고 첨부하는 독특한 사진작가가 있다. 인천시 강화에서 살고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1967년생)가 바로 그다. 그는 평화운동가라는 소리를 듣고, 심지어 국제정치학자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가 지난해 쓴 844쪽의 <유엔군사령부>(들녘)는 66쪽에 이르는 참고문헌과 1763개의 각주가 달린 방대한 학술서로 주목을 받았다. 유엔군사령부와 관련해 유엔의 활동과 국제법의 원전을 추적했으며, 우리 헌법까지 조밀하게 따졌다. 실제 이 책 출판기념회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 2개가 녹아 있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는 방대한 각주
사진작가가 예술 쪽 책을 낸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국제정치 전문서적을 낸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다고 그가 쓴 책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그가 쓴 <민통선 평화기행> (창비)은 한국을 대표하는 100권의 책에 뽑혀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2004)에 출품될 정도로 수준을 인정받았다. 그의 최종 학력은 전문대 사진과 1학년 중퇴다.

그는 이번에 제주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여행한 기행문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도서출판 말)을 펴냈다. 앞서 <민통선 평화기행>의 2탄격이다. 이 책 역시 사진을 담은 기행문이지만 1000개가 넘는 각주를 달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오키나와 유엔군사령부 문제는 물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MD(미사일방어체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나는 강화를 떠나 비무장지대를 걸어 부산까지 내려간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오키나와까지 두 달간을 걸으며, 사색하고 또 사색했다. 이 유엔사 해체를 위한 걷기 명상은 나에게 한국과 일본, 제주와 오키나와를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주었다.”

손바닥만한 구형 ‘똑딱이’로 찍는 작가
이시우는 사진 촬영 전 피사체의 본질에 대해 ‘처절하게’ 연구하는 독특한 사진작가다. 책은 그 결과물인 셈이다.

이번에 출간한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은 공간적으로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에서부터 멀리 오키나와에서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는 헤노코 농성장을 넘나드는 기행문이다. 여기에 고려 삼별초에서부터 오키나와 우라소에 성, 그리고 1920년대 고려공산당원과 비슷한 시기 일본 천황제 폐지를 주장한 일본공산당 당수를 연결하는 시간적 기행도 함께한다.

그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앞서 낸 <유엔군사령부>와 일면 같은 맥락이다. 제주나 오키나와 모두 각각의 섬 문제가 아닌 미국의 반공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비롯된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주 4·3을 남한의 내부 문제로만 봤다”면서 “서북청년단 뒤에는 이승만의 반공주의, 즉 세계적 반공주의 의제가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시우는 충남 예산이 고향으로 시골에서 중학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유학, 1987년 신구전문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렵게 농사를 짓던 아버님이 무리를 하며 비싼 카메라를 사주신 것을 지금도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그는 사진 공부보다 시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6·10항쟁이 내 운명을 바꿨고, 내 삶도 바꿨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공사로 파괴된 제주 강정마을 구렁비 바위 해안.(사진 위)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오키나와 헤노코 농성장. | 이시우 사진


그는 사진을 찍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생각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88년 청계피복노조원 사진반에서 사진을 가르치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자신의 과거에 관한 사진을 찍어보라고 했는데 한 노동자가 콘크리트 벽에 대못이 박힌 사진을 찍어 왔다. 왜 이런 사진을 찍었느냐고 물으니 과거 구두닦이 시절, 구두통을 못에 걸어놓는 조건으로 왕초에게 상납했다는 것이다. 그 노동자는 당시 어린 마음에 이 못값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때 나는 못 하나에 이렇게 충격적인 사연을 상징화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후 내 사진의 흐름이 바뀌었다.”

지뢰·철조망 찍어 표현하는 주제는 평화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


그는 1992년 대선이 끝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사진을 시작했다. 그는 “똑딱이 카메라로 나만의 사진을 찍을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사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작가이지만, 손바닥만한 구형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로 모든 작품을 찍는다. 그는 똑딱이 카메라 하나 들고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을 누볐다. 그의 피사체는 지뢰로 다리를 잃은 농부,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주민 등이다. 이렇게 찍은 작품은 1999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한국의 대인지뢰 피해자들>로 발표되고, 몇 차례 국제전에 초대됐다.

그가 비무장지대 지뢰 사진을 찍다가 고민한 것이 바로 유엔군사령부의 존재였다. 그는 공부 끝에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사참모위원회가 아닌 미 합참의 지휘를 받는 미군”이라며 “유엔사의 존재는 유엔 결의도 어기고, 또 우리 헌법에도 위배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2007년 그는 이런 주장을 폈다가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경찰의 무단 체포에 항의해 무려 48일간 단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재판을 하면서 유엔사 해체는 ‘한 사진작가의 어설픈 주장’이라는 검찰 측 증언을 반박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이 공부의 결과물이 바로 <유엔군사령부>이고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이다. 결국 그는 치열한 재판 끝에 5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국내는 물론 네델란드·독일·미국에서 사진전을 열었다. 국내 유명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그러는 사이 박종철인권상(2007), 사월혁명상(2008), 늦봄통일상(2010)도 받았다. 사진작가이면서 평화운동가라는 평가도 이어졌다.

그의 본업은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주제는 평화다. ‘평화’ 하면 비둘기나 잔잔한 호수, 아름다운 꽃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지뢰나 철조망, 미군 장갑차 등이 등장한다. 불편하고, 보기 싫고, 외면하고 싶은 것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평화는 지뢰 뒤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중심은 심장이나 머리가 아니라 가장 아픈 곳이다. 우리의 시선을 바로 그 아픈 곳으로 이끄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말했다.



“어떤 예술적 이미지도 세상의 진리 담고 있어야”

이번에 <제주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낸 의도는 무엇인가.
“지난번 <유엔군사령부>에서의 고민을 이어서 쓴 것이다.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미국의 문제이면서 유엔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주와 오키나와를 오가며 이를 어떻게 극복할까를 고민한 것이 바로 이번 책이다. 비슷한 운명의 제주와 오키나와에 대해 단순한 공간뿐만 아니라 역사를 넘나들며 쓴 것이다.”

이번 책에도 각주가 많다. 그 참고문헌을 다 찾아보기 쉽지 않았을 텐데.

“논문식 원고를 기행문으로 바꿨는데도 각주가 많이 남았다. 국회도서관과 서초동 중앙도서관에 대부분 자료가 있다.”

방대한 국제관계 영문자료를 섭렵할 정도로 실력이 되는가.
“떠듬떠듬 볼 줄은 안다.”(허허)

제주 4·3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제주 4·3은 당시 위정자가 서북청년단을 이용해 자행한 것 아닌가. 최근 그런 서북청년단을 계승하겠다는 단체가 나왔다.
“하휴~,(한숨) 글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제주 4·3을 남로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책도 마구 만들고 있다. 사실 이번 책을 쓰면서 민주진영에서도 제주 4·3을 보는 시각을 전향적으로 바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주 4·3은 당시에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는 국가가 없어 내란이라고 할 수 없고, 당시 남로당은 합법적 정당이었다. 뭘 보더라도 4·3은 반란이나 폭동이 아니다.”

사진작가인데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어떤 카메라인가.
“보여드릴까.(그가 꺼낸 사진기는 손바닥만한 ‘캐논 IXUS105’로 단종되고, 몇 번이나 수리를 했다고 한다) 작품사진 다 이걸로 찍는다.”

요즘에는 사진 동호회 아주머니도 굉장히 좋은 카메라 가지고 다닌다.
“사진을 공부해 보니 과거 유명한 사진작가들이 쓴 카메라는 이 똑딱이 카메라 성능에도 미치지 못했다. 가로세로 1m 정도까지 작품을 출력하는 데 아무 문제없다.”

이 똑딱이 카메라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나.
“물론 그렇다. 모든 것을 모두 잘 찍는 카메라는 없다. 작가는 찍는 소재에 따라 카메라를 고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나 스포츠 사진 작가는 굉장히 큰 렌즈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겁기만 하다. 나도 오산 미군기지 탄약고를 찍기 위해서 국내에서 제일 큰 망원렌즈를 빌려 사용했다. 그런 경우 아니면 보통 이 카메라로 충분하다.”

사진을 잘 찍는 비결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셔터를 누를 때 자기는 처음 찍는 사진이라고 생각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자기에게 입력된 이미지를 반복적·관성적으로 누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을 많이 찍지만 그 사진이 그 사진인 것은 그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찍기 위해선 피사체에 대한 연구,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기에 투자하는 것보다 피사체 공부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이미지가 찾아질 수 있다.”

작품은 좀 팔리는가.

“사진작가 치고 조금 팔리는 작가 축에 든다.”(허허)

사진으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얘기인가.

“우리나라에서 사진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안 된다는 의미)

사진작가와 저술가, 무엇이 주업인가.

“사진작가다. 책은 사진 작업의 결과물이다. 사진을 위한 글이다. 내 기준으로 사진은 충분한 이론적 준비, 실천을 통한 검증이 동반돼야 새로운 미학적 이미지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한 장의 천재적인 사진으로 결론을 내는데, 나는 아니다. 어떤 예술적 이미지도 세상의 진리를 담고 있어야 예술이 산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름답고, 독특하고, 새로운 것만으로 평가받는 예술은 오래 못 간다.”

한 장의 이미지로 승부를 내는 것보다 각주가 1700개가 넘는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런 작업 아닐까.

“그것도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텍스트는 훈련으로 논리적 입증을 하면 되는데, 사진가는 그것을 뛰어넘어 이미지까지 찾아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건방진 말인지 모르지만 예술적 사유가 학문적 사유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