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편집장 편지

정부 정책은 연필로 쓸 수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과 현대건설에서 함께 근무했던 사람에게서 1960~70년대 건설업계 분위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대목은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방법입니다. 당시 건설회사들은 수주할 때, 특히 설계를 변경할 때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 시기 이명박 사장은 결재를 꼭 연필로 했다는 겁니다. 물론 정식 공문도 없고요. 연필로 ‘건설부 모 국장, 1천’에 사장 사인이 있는 메모지를 경리과에 가져가면 커다란 금고에서 1000만 원짜리 돈가방 하나를 주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물론 뇌물이 불법이니까 정식 서류도 아닐 테고 또 유사 시 문제가 될 우려도 있으니 증거를 없애기 위해 지우기 쉽게 연필로 결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정부 정책은 조금, 아니 많이 다릅니다. 국가 정책은 입안 단계부터 치밀한 검토와 공청회 등을 통한 이해당사자의 조율, 거기에 관련 부처의 의견 수렴과 민심(표)을 생각하는 여당과 야당 등과 협상을 거쳐 확정하는 것입니다. 오너가 결심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반 회사와 천양지차입니다.

이 대통령의 18번이 “너 해봤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일단 해보라는 것으로 건설회사 사장 때부터 보여온 스타일입니다. 이런 스타일은 대통령이 된 지금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덜컥 30개월 이상 된 소 수입을 허용했다가 반발이 심하니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나, 환율이 IMF 외환위기 때 수준에 이르는 데도 엄청난 달러를 쏟아부은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려 드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미분양 주택이 넘치는데도 그린벨트를 풀어서 공급을 늘리는 것이나, 종부세를 무력화하고 재산세를 늘리겠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번 호 weekly경향에서 지적하듯이 안보 문제나 송파·분당 주민의 반대에도 특정 재벌에 초고층 건축을 허가할 움직임을 보면, 건설업계를 살리기 위해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건설회사 사장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 보완하면 되고’식의 정책 집행은 연필로 결재할 때 습관이 남아서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요즘 검찰이 봉화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하고 있는데, 문제의 전자결재 프로그램 이지원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과장-국장-차관-장관-대통령 등 결재권자의 의사가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과장이 국장, 차관 결재를 받을 때 상관의 의중에 따라 결재서류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지원은 원래 기안한 결재 서류에 중간 간부의 의견(정책 변화)을 고스란히 기록에 남기도록 했습니다. 국장, 차관, 장관 중 누가 정책을 어떻게 변경하거나 개악했는지 기록에 남겨 책임 행정을 꾀하기 위한 무서운 장치인 것입니다. 연필로 결재하는 것과는 180도 아니 1800도 다른, 매직펜으로 결재한 사실을 영원히 남기는 방식입니다.

이런 게 정부의 정책이고 책임 행정입니다.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대중가요도 있고 “비자금 결재는 연필로 하세요~”도 좋지만 정부 정책은 하다 안 되면 지우는 연필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원희복 편집장 wonhb@kyunghyang.com>

2008/10/07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