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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총에 꺾인 펜 제 7 장 총에 꺾인 펜 1. 5·16 1호 구속 5월 16일.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 1호를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리고 포고령 2호 금융동결, 포고령 3호 공항 항만봉쇄···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졸지에 일어난 쿠데타 소식은 뜨겁던 초여름을 단번에 냉각시켰다. 각 신문 편집국은 쿠데타 주역이 누구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육군본부 출입기자의 전화가 날아 온 것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다. “쿠데타의 주동인물은 박정희 소장인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7시40분 박정희 소장과 김동하 해병대 예비역 소장, 김윤근 해병대 제1여단장, 채명신 5사단장 등이 육군본부를 접수했답니다” 즉각 박정희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오후에 들어 박정희에 관한 인물정보가 속속 들어왔다. “경.. 더보기
제6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제 6 장 민족일보 내부 문제와 조용수의 고민 1. 갈등과 발전 민족일보는 가판에서 더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장면 정부의 탄압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다 다시 발행한 이후 많은 국민은 민족일보를 신문다운 신문으로 평가했다. 당시 언론계는 민족일보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 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불과 반개월 동안에 5만부의 부수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지의 민의봉쇄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독자)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으로 혁신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지들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에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건곤일요의 결의가 없고 기성언론계가 낡고 썪.. 더보기
제5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제 5 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 민족일보 창간 국회에서 한바탕 논란을 거듭한 후, 민족일보에 대한 논란은 표면적으로 나마 잠잠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간자금의 출처에 대한 의혹의 눈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시각은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이 신문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이 창간자금에 대해 책임질 만한 입장이 아니고 신문창간의 자금은 조용수를 비롯한 몇몇 경영진에 의해 마련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문창간 예정일인 2월 8일은 지키지 못했지만 창간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주필 겸 편집국장은 이종률이 담당했고, 취재담당 부국장 겸 사회부장에 경향신문 사회부장 출신의 오소백, 편집책임부국장에 서울신문 편집국장출신 권일하 등을 영입했다. 조용수는 기자 구성을 국장 1명 부국장 2명.. 더보기
제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제 4 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60년 11월 4일. 조용수는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낙선의 회한을 달랬다. “이번 기회가 나의 뜻을 펼쳐 볼 수 있는 처음의 기회였는데 ···괜찮다고는 했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영근 선생에 대한 면목도 안서고···”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혁신은 곧 공산당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혁신계가 단일화 하지 못한 것도 중요한 패인이었다. 이번에 추진하는 민간통일 기구 민주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을 통해서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야 하는데” 조용수는 공천과정과 선거 전후에 나타난 혁신의 분열, 자신의 목전 이익만 따지는 혁신인사에 적지 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도 독립운동, 통일운동을 하느.. 더보기
제3장 새로운 꿈을 품고 제 3 장 새로운 꿈을 품고 1. 꿈틀대는 혁신세력 1960년 3월. 일본 도교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치키현(板木縣) 민단 사무실. 한적한 지방 민단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조용수는 성난 표정으로 신문을 집어던졌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어. 그 이승만의 노욕은 죽기 전에는 그치지 않을 거야. 이것 보라고, 이기붕을 후계자로 앉히기 위해 이런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나. 그걸 막을 인물도 없고. 조봉암 선생을 죽였는데도 한국에서는 잠잠했잖아. 이젠 한국에서 이승만과 대적할 더 이상의 지도자도 없어” 같이 민단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윤수길도 거들었다. “조형, 그래 내가 뭐랬나. 이젠 한국에 돌아갈 생각 말고 여기서 터나 잡을 생각을 해” “그래,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아···가봐야.. 더보기
제2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제 2 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1. 출생과 성장 조용수는 1930년 4월 24일(호적상 4월20일) 경남 진양군 대곡면 단목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진주 남강과 낙동강이 접하는 곳이다. 또 용화산을 경계로 의령과 함안이 접해있는 곳이다. 원래 조용수의 가문은 조용수의 13대 할아버지가 동궁의 서승으로 학문을 하는 고집 센 영남 양반가문이었다. 일제시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경성제대 산부인과에서 근무했던 조경규(趙瓊奎)씨가 작은 아버지다. 대구신보(大邱新報) 시사신보(時事新報) 사장을 지낸 조경규씨는 2대, 3대, 4대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번이나 지냈다. 조용수의 아버지 조판상(趙判祥)씨는 진양의 만석꾼 하종식(河宗植)씨의 딸 하규남(河珪南)씨와 결혼했다. 어머니쪽 집안도 역시 알아주는 진주의 명.. 더보기
제1장 한 젊은이의 죽음 趙 鏞 壽 評 傳 元 熙 福 차 례 제1장 한 젊은이의 죽음 7 1. 1961년 12월 21일 오후 4시 6분 7 2. 뜨거운 세계여론, 냉담한 한국여론 15 3. 41년 만에 재연된 민족일보 국회논란 24 제2장 격정의 역사속에서 40 1. 출생과 성장 40 2. 일본시절 43 제3장 새로운 꿈을 품고 56 1. 꿈틀대는 혁신세력 56 2. 정치도전의 좌절 63 제4장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면서 73 1.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73 2. 신문 창간 막후 85 3. 장면정권의 음모 95 4. 정치쟁점 된 민족일보 99 제5장 민족일보 창간, 통일에의 도전과 응전 110 1. 민족일보 창간 110 2. 첫 도전, 한미경제협정 117 3. 2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 124 4. 통일적이고 애족적인 통일세력 .. 더보기
검찰 전두환 자택 압수수색…정국 물타기? ▶검찰 전두환 자택 압수수색…정국 물타기?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추징금 집행’ 전담팀은 16일 전 전 대통령의 자택과 장남이 설립한 출판사 시공사 등 10여곳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연희동 자택은 1985년 검찰이 전두환비자금 수사과정에서 ‘전직 대통령의 예우’ 차원에서 압수수색을 포기한 곳이다. 금속탐지기까지 동원해 실시한 검찰의 이날 연희동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미술품 180여점과 현금, 도자기 등을 압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미술품 구입의 자금 출처를 확인해 전 전 대통령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국고로 귀속시킬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전 전대통령의 시효는 늘어난다. 검찰은 또 장남 재국씨가 1990년 설립한 출판사인 시공사와, 재국씨가 소유한 경기도 연천에 있는.. 더보기
‘4대강·감사원 계속 엇박자’…청와대·새누리당 ▶‘4대강·감사원 계속 엇박자’…청와대·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감사원에서 발표한 부분을 앞으로 소상하게 밝혀 의혹이 해소되도록 하라”면서 “이번 감사결과를 계기로 대규모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반복되는 갈등을 근원적으로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추진 원칙과 기준을 마련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이 지시는 감사원의 4대강 발표를 신뢰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형 국책사업을 재검토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감사원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3번의 사전·사후 감사를 통해 감사결과를 달리 발표했는데 과연 어떤 감사결과가 맞는지 신뢰성에 의구심을 갖게한다”면서 “감사원은 자체감사를 통해 왜 다른 감사결.. 더보기
46년전과 오늘,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 엇그제,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대선 과정에 문제가 됐던 국정원 댓글과 NLL 관련 의혹으로 여전히 혼란과 반목이 거듭되고 있어 유감”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선이 끝난지 6개월이 됐지만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급기야 국방부가 가세하고 인신공격성 성명이 난무한다. 고등학생까지 가세한 시국선언은 암울한 권위주의 시절(우리가 권위주의 시절이라는 구분은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까지로 본다-이는 민주화보상 관련 특별법에서 내린 유권해석이다) 지성인들이 양심을 일깨우는 용기로 인식됐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이 시국선언을 매우 두려워했다. 시국선언과 함께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촛불시위도 다시 등장했다. 시국선언이 지.. 더보기